내 가방에 내가 없다 1화
나는 새것을 좋아한다.
소유의 기쁨, 시작이라는 설렘,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새것과 함께 나도 새 사람이 된 듯한 느낌까지.
새 학년이 될 때면 그 기분에 어울리는 새 가방을 가지고 싶었지만 알뜰한 엄마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잔스포츠가 어찌나 부럽던지.
한 번 더 졸라볼까 하다가도 엄마의 가방도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멈추게 했다.
결국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국내 중소브랜드의 크고 튼튼한 회색 백팩을 들고 다녔다.
토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길 때면 사물함을 열고 무슨 책을 가져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공부하고 싶을 때 책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결국 사물함 속 책을 모두 가방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무거운 가방은 나를 점점 땅속으로 내리찍는 듯했고, 어깨에는 뻘건 가방 끈 자국이 남았다. 주말 동안 공부라도 많이 했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책 한 두 권도 겨우 펼쳐보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부랴부랴 가방에 다시 담았다.
분명히 토요일 오후와 같은 무게일 텐데 월요일 아침엔 죄책감과 후회가 더해져 가방은 더 버거웠다.
가방의 무게가 버거웠던 이유였을까.
매 학기 적어내는 희망직업란은 부모님이 먼저 적어주시면 내가 따라 적었다.
의사, 약사. 그 길도 나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건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인 데다가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런 직업은 부모님의 자랑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우리 집 기둥, 우리 집 대들보, 엄마아빠의 희망.
나는 이름으로 불린 기억이 없다.
나의 이름은 장녀였다.
부모님은 일 년에 단 이틀, 설날과 추석에만 쉬시며 일을 하셨다. 2살 터울의 동생의 사춘기는 유난스러웠고 IMF 외환위기는 유독 우리 집에 깊고도 긴 흔적을 남긴 것 같았다.
그래, 나라도 잘하자. 부모님께 기쁨이 되자. 그 시절 효도하는 방법은 공부뿐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길을 걷는 것. 나는 공부를 해야 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조르면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겠지만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사는 장녀에게 그런 결심은 이기적이고 건방진 불효였고, 평생 죄책감과 후회를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용기는 없었지만 다행히 공부를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무거웠던 건 주말마다 가방 가득 담았던 책이 아니라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과 부담감이었다.
장녀라는 이름은 어깨 위로 남은 가방 끈 자국만큼이나 선명했다.
<함께하는 작가들>
지혜여니 https://brunch.co.kr/@youni1006
따름 https://brunch.co.kr/@blueprint22
다정한 태쁘 https://brunch.co.kr/@taei2411
김수다 https://brunch.co.kr/@talksomething
바람꽃 https://brunch.co.kr/@baramflower-jin
아델린 https://brunch.co.kr/@adeline
한빛나 https://brunch.co.kr/@growdream
새봄 https://brunch.co.kr/@spring-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