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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동화책과 여행놀이가방

내 가방에 내가 없다 2화

by 김수다

딸아이가 다섯 살 쯤이었을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모험을 즐기는 상황극 놀이를 자주 했다.

우리끼리는 여행놀이라고 불렀던 이 놀이를 할 때면 아이는 작은 여행가방을 꺼내와 장난감 화장품, 반짝이가 달린 화려한 스커트, 작은 젤리를 뒤죽박죽 넣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명작동화전집 앞에 서서 어떤 책을 가져갈지 고민을 했다.


또래 아이들처럼 공주를 좋아하는 나의 공주는 항상 공주이야기 책을 선택했다. 아마 자기도 공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넌 나만의 공주, 앞으로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백 살이 되어도 영원히 나에겐 공주님일 거야.

그렇게 아이와 여행놀이 가방을 챙기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어딘가 놀러 가는 상상의 놀이를 자주 했었다. 소꿉놀이세트가 들어있는 장바구니 모양의 가방에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는 척을 했다. 이 소꿉놀이가방세트는 유치원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주셨던 선물이었다. 아빠의 교통사고로 동생과 함께 고모댁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신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선물을 주시며 나를 안아주셨다.


이렇게 큰 소꿉놀이가방세트는 처음이었다.



사고와 실직으로 아빠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고 있었고, 예민하고 날 서 있는 아빠를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저녁 8시가 되면 온 집안 불을 꺼야 했고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다. 혹시라도 아빠의 다리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아빠는 화를 냈다.


언젠가 하필 아빠의 아픈 다리 위로 동생이 넘어졌고, 아빠는 비명과 함께 동생을 때렸다.


누구의 비명소리가 더 크고 고통스러웠을까. 무섭고도 슬픈 선명한 기억.

그 시절 나도 명작동화전집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는 방에서 혼자 책을 읽던 나를 품에 안고 내가 읽던 책을 마저 읽어주셨다.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아 가만히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처럼 웃지 않는 아빠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의 아빠니까.

그 책의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아빠는 울었다. 나를 안은 채로.

무표정한 아빠의 슬픔.

내 손위로 떨어지던 눈물방울과 어색하기만 했던 그 울음소리.


아빠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멜로디언으로 아리랑을 연주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던 멜로디언을 가져와 그 작은 손으로 아리랑을 쳤다.


그 상황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는 그때를 기억할까.

내가 그때를 아직 기억하는 걸 아빠가 알고 계실까.



부모의 눈물은 아이의 마음에 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남는다.

아픈 부모가 미우면서도 측은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몰래 울 때가 많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부모가 불쌍하면서도 미련해 보여 마음이 아렸다.

내 아이의 명작동화전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시릴 때가 있다.

책을 펼치면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나의 어린 시절처럼, 눈물에 젖어 쭈글쭈글해진 페이지가 가득 있을 것만 같아서.

나의 아이는 아이답기를, 철없이 고집도 부리고 투정도 부려보기를.

그저 해맑게, 걱정 없는 미소로 편안히 잠에 들기를.

나의 간절한 바람과 함께 아이와의 여행놀이에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의 책을 가방에 넣는다.


<함께하는 작가들>

지혜여니 https://brunch.co.kr/@youni1006

따름 https://brunch.co.kr/@blueprint22

다정한 태쁘 https://brunch.co.kr/@taei2411

김수다 https://brunch.co.kr/@talksomething

바람꽃 https://brunch.co.kr/@baramflower-jin

아델린 https://brunch.co.kr/@adeline

한빛나 https://brunch.co.kr/@growdream​​

새봄 https://brunch.co.kr/@spring-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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