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나 시간을 다시 배운다.
급하다, 급해. 나이가 드는 만큼 시간의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출처: 픽사베이
빨리빨리, 빨리빨리
자타공인 조급증 분초인간.
촘촘하게 짜여진 스케줄, 보다 더 효율적인 하루,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이 뜨거운 아줌마.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면 내일 할 일도 미리 해두는 부지런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쉼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바로 나.
완벽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다. 데드라인에 임박하면 마음이 급해지고 걱정과 불안으로 제 능력만큼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늘 빨리빨리를 외치고 살았다.
숙제든 발표든 시험공부든 미리미리.
손도 빠른 편이다. 집안일도 착착.
샤워도 순식간에 후다닥.
식사도 짧게. 양은 무관하다. 매년 새해 계획에 음식 천천히 먹기가 있지만 늘 실패한다.
이런 나에게 가장 분주한 시간은, 바로 아침이다.
햇빛과 마주하며 여유롭게 즐기는 커피 한 잔, 음악과 독서로 시작하는 우아함을 꿈꾸지만 현실은 우당탕이다. 출처: 픽사베이
아이를 보채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좀 더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워킹맘.
어제저녁 설거지한 것과 새벽택배 온 것들을 정리한다. 아이가 학교에 가져갈 물건들을 정리해서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둔다.
아직 자고 있는 아이방을 제외하고는 온 집안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어낸다. 조용히 청소포로 밀대질을 한다.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한다.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이제 아이가 일어나면 같이 식사 후에 치우고 옷만 갈아입으면 끝.
오늘은 여유롭게 집을 나서보자. 웃으며 손잡고 걸어 나가는 너와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하하 호호 웃으며 시작한 아침 식사 시간.
나와는 다른 나의 아가, 초등학교 1학년 우리 할로. 그야말로 세월아, 네월아. 우물우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다가도 저래서 언제 먹을까 싶다.
“우리 조금만 빨리 먹을까? 한 번에 좀 많이씩 먹어볼까?”
웃는 얼굴로 말해보지만 굉장한 속도로 내뱉어진 말들.
그래도 지금까지는 괜찮아. 잘하고 있어.
아이가 식사를 하고 나면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고, 식탁을 닦으면서 알람을 맞춘다.
“시리야, 10분 후에 알람 맞춰 줘.”
시리(Siri)는 애플의 음성비서이다. 작년 아직 쓸만한 애플워치를 굳이 바꾼 이유는 음성인식기능 때문이었다.
손목을 입에 가까이 대고 마치 스파이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속삭인다.
“시리야 , 10분 후에 알람 맞춰 줘.”
똑딱똑딱.
나에게 남은 시간 10분.
10분간 내가 해야 할 일은, 설거지와 청소다. 내가 양치하고 출근할 옷으로 갈아입는 데에 6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난 10분 안에 설거지와 청소를 마쳐야 한다.
아침에 청소를 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 하면서 엄청난 빵가루가 식탁 아래에 떨어졌다. 그리고 아이는 옷에 빵가루를 엄청나게 묻힌 채로 거실로 뛰어갔다. 그 흔적이 바닥에 그대로다.
청소기를 들고 나온다. 무선청소기라 다행이다. 집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다.
맨 끝, 아이방부터 청소기를 손에 쥐고 종종걸음으로 달려본다.
저 바닥 모서리 구석, 청소기로 만족이 안된다. 당장이라도 손걸레 들고 오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참자.
나에겐 10분밖에 없다. 다음부터 청소기 돌릴 때에는 안경을 벗고 해야겠다.
식탁 의자를 다 빼고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 뭐 이리 많이 흘리고 먹었노. 이놈의 빵 부스러기. 나도 많이 흘리긴 해서 뭐라 말은 못 하지만.
밀대질을 하긴 했지만 안방도 청소기를 돌린다. 화장대 바닥의 이 머리카락은 다 누구의 것이냐. 내 것인가. 어쩌나.
안방까지 청소기를 돌리고 나면 다시 거실로 나온다.
앗.
아직 할로는 소파에 누워있다. 난 이렇게 바쁜데. 같은 시공간에서 이렇게 이질감이 느껴지다니.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서는 다리를 흔들흔들 거린다. 참 이쁜데. 참 속도 터져. 넌 누굴 닮았니.
이제 난 싱크대 앞에 섰다. 시계를 한번 본다. 4분. 고무장갑을 낀다 착착. 면장갑은 필수.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애벌설거지를 해야 한다. 식기세척기 사용 불가인 예쁜 커틀러리나 접시는 아침에 안 쓰려고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그렇지가 않잖아.
달그락달그락.
엇. 아직 설거지 정리가 안 끝났는데. 싱크대 물기도 닦아야 하는데. 알람이 울린다.
뒤돌아서 소파 위 할로를 쳐다본다.
아직도 누워있다. 나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진다. 심박수 상승.
“할로야. 이제 8시 다 됐는데, 치카랑 세수할까?”
언젠가 엄마는 잔소리쟁이라고 한 말에 상처가 남았다. 내 생각엔 아빠가 더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왜 엄마만 잔소리 쟁이냐는 내 말에, 엄마는 늘 느낌표로 말하고 아빠는 물음표로 말한단다.
반박하려면 나도 할 말 많지만 심호흡과 함께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킨다.
그리고 물음표로 끝맺음해 본다.
“이제 학교 갈 준비 할까?”
할로가 슬슬 일어난다. 정말 느리다. 아. 너는 거북이띠였니. 참 태평하다.
딸깍.
화장실 조명 켜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나도 빨리 마무리해야지.
행주를 벅벅 빨고 있는데 콩콩콩, 할로의 걸음 소리가 들린다.
왜 치카를 안 하고 다시 나온 거지. 분노 온오프 버튼이 켜졌다. 온.
뒤돌아보지 말자.
빨리 하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 지각하잖아. 엄마도 출근해야 하는데! 엄마도 지각한다구.
이미 속으로 백번 외쳤지만 아직 입으로 분출 직전.
그래, 참자. 아직 아니야. 진정해.
그때 내 다리를 힘껏 안는다.
나의 아가. 초등학교 1학년 언니 티가 제법 나는 우리 아가.
너와 손잡고 걸을 때, 이 세상에 우리 둘로 가득차서 행복이 넘치는 것 같다고 느껴. 엄마가 되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행복이야. 고맙다, 나의 아가. 출처: 픽사베이
나는 멈칫한다.
엄마, 사랑해. 정말 많이.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고 꼭 얘기하고 싶어서 다시 나왔어.
그제서야 나는 뒤를 돌아본다.
할로는 나를 올려다본다. 어렸을 때 그 예쁘고 귀여웠던 그 얼굴, 그 눈빛. 내가 몹시도 사랑하고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아이.
우리의 눈이 가까워졌다.
언제 이렇게 많이 큰 걸까. 곧 엄마와 얼굴을 마주하겠다. 너의 눈이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너의 눈에 내가 비친다.
나를 안아주는 너의 힘찬 두 팔, 우리의 격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엄마, 사랑해.
나에게 얼굴을 파묻고 비빈다.
콩콩콩, 너의 걸음소리에 뒤돌아 내 할 말 그대로 쏟아냈다면 듣지 못했을 귀한 이 고백들.
할로는 다시 화장실로 간다. 드디어 치카를 하러 갔다.
시계를 본다. 8시 2분이다.
이 엄청난 고백은 1분이면 충분했다.
1분으로 내 아침이 바뀌었다. 내 하루가 바뀌었다. 내 인생이 바뀌었다.
오늘 이 아침.
나의 조급함이 꼭 필요했을까.
아이의 게으름과 느긋함에 나를 반성한다. 그리고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