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엄마의 F 되는 마법
이제는 단순한 성격유형검사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은 MBTI.
20여 년 전 대학생 시절, 별자리와 혈액형, 띠별 오늘의 운세에 익숙했던 때였다. 나는 진로 상담을 위해 MBTI라고 하는 낯선 검사를 받았었다. 오래전이라 어떤 상담 내용이 오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지금 나는 그 상담 내용과 무관하게 잘 살고 있지만 나의 유형은 ENTJ, 극단적인 TJ라 상담선생님께서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경향성은 좋지 않으니 균형을 맞춰보도록 노력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이제는 누구도 별자리와 혈액형, 띠별 오늘의 운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시대가 왔고, 나는 여전히 ENTJ, 여전히 변함없는 파워 TJ. 역시 난 한결같은 사람. 단단한 소나무 같은 여자. 자타공인 TTTTTTTTTTJJJJJJJJJJJJJJJ.
하지만 나에게도 T 보다는 F 가 크게 작용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육아.
아이와 함께 할 때 내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극단적 F 인 주책바가지다. 허나, T 심은 데 T 나는 법.
엄마, 나랑 둘이 외식하면 좋지? 돈은 좀 써도 설거지도 안 하고 좋잖아. 사진출처: 픽사베이
얼마 전 어느 가게 사장님이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우리 딸 할로에게 6살이냐고 물었단다. 에휴. 아무래도 입이 짧고 잘 먹지 않아 체구가 작은가 싶어 나는 늘 좀 더 맛있게, 좀 더 먹음직스럽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먹을까를 고민했다.
그날의 아침 메뉴는 주먹밥이었다. 멸치주먹밥, 참치주먹밥, 채소주먹밥.
고소하게 볶은 멸치를 견과류와 함께 탁탁탁 칼로 잘게 다녀 넣고,
기름 쪼옥 뺀 통조림 참치에 마요네즈 쭈우욱 짜 넣어 비벼주고,
양파, 당근, 호박을 종종 썰어 기름에 들들 볶아주고,
윤기 차르르 흰 밥 위에 참기름 조르륵, 깨소금 톡톡 뿌려 준비한 재료들과 섞어 한 입 크기로 동글동글 주먹밥을 만든다. 온 집안 꼬순내가 폴폴. 이 정도에서 끝내면 아쉽지. 치즈를 하트모양으로 잘라 주먹밥 위에 얹어주면, 짜잔. 완성. 뿌듯함도 가득.
일어나 눈 비비고 걸어 나오는 우리 할로, 딱 봐도 입맛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이 냄새는 못 참고는 못 배기겠지. 하하하. 이 엄마의 작전이 성공할 것인가. 의자에 앉은 아이 앞으로 접시를 짠 하고 내려놓고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것 봐, 할로야. 정말 맛있겠지? 엄마가 할로 위해서 만들었어. 이 치즈 좀 봐. 예쁘지? 하트모양.
엄마의 사랑이야. 엄마가 우리 할로 생각하면서 만든 거라 하트가 있어. 우리 할로가 이거 먹으면 엄마의 사랑을 먹는 거거든. 그러면 할로는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거야. 알았지? “
“엄마. “
엇, 아이가 웃질 않는다.
“엄마. 이게 무슨 엄마의 사랑이야. 엄마, 이거는 그냥 밥이지. 이거 먹으면 다 똥 되는 거야. 엄마 그것도 몰라? ”
엄마의 사랑을 ‘이건 결국 소화돼서 배출되는 물질’이라고 말하는 만 7세 어린이.
그래, 야. 나도 이거 똥 되는 거 다 알거든. 내가 모르고 그랬겠니.
할로, 나중에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지?
에이. 아빠는 이미 한번 했잖아. 아빠랑은 안 하지. 사진출처: 픽사베이
할로가 밸런타인데이 한참 전부터 초콜릿만 보면 밸런타인데이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했다. 요 녀석, 많이 컸네.
“그게 무슨 날인지 알아? “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초콜릿 주고받는 날이잖아. ”
“그날을 기다리니? ”
“뭐 그런 건 아닌데, 재밌잖아. ”
남편에게 미리 말을 했다. 할로가 밸런타인데이를 기대하는 눈치라고. 정작 밸런타인데이에는 대학교 선배형과 한 잔 약속 이미 해버린 남편은 2월 13일에 초콜릿 두 개를 사 왔다. 할로 덕분에 나도 하나 받았네. 앗싸. 초콜릿 조각 하나 입에 넣더니 맛있는지 초코로 시꺼메진 이를 다 드러내놓고 웃는 아이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맛있어? ”
“응. "
"초콜릿 많이 좋아하는구나. ”
“응. 초콜릿 먹으면 기운이 나잖아. ”
“그래? 왜? 왜 기운이 나? ”
지금은 단 간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도 전에는 초콜릿을 꽤나 좋아했다. 일단, 끼니가 아닌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여유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고,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는 감각에서 오는 편안함, 달콤함이 주는 행복감이 좋았다. 우리 딸도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젊었을 때의 나처럼. 아직 어리니까 초콜릿을 좋아하는 이유를 얼마나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겠어, 그저 맛있어서라고 말하고 방긋 웃어주는 얼굴을 기대했을 뿐이지.
“엄마. 왜긴. 초콜릿에는 당류가 많아. 이게 다 에너지야. 많이 먹으면 안 돼. ”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참고로 우리 남편은 F. 참 너를 닮았다,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남편이다.
여긴 여자 토끼가 사는 집이고, 옆집에는 남자 토끼가 살아. 종알종알.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이 토끼는 결혼했대.
옆집 토끼랑 결혼한 거야?
아니. 엄마. 결혼을 왜 옆집이랑 해. 사랑하는 토끼랑 하는 거지. 출처: 픽사베이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할로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의 눈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있는 거라고. 내가 그 말을 할 때면 할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할로, 엄마 눈을 잘 봐. 엄마 눈에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가 있는지 한번 볼래? ”
가까이 다가오는 우리 할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란다.
“엄마, 엄마 눈에 할로 들어있어. 엄마는 나를 가장 사랑하나 봐. ”
그때 그 순간이 온전히 기억난다. 우리 할로의 보드라운 얼굴, 귀여움 음성, 내 품에 가득 안긴 따뜻한 몸과 그 까만 머리칼에서 나던 다정한 냄새까지.
“할로, 가서 거울 봐봐. 할로 눈엔 누가 들어있는지. ”
바로 거울 앞으로 달려가 까치발을 들고는 한참을 들여다본다.
“엄마, 내 눈에는 할로가 있어. ”
“맞아, 할로는 할로를 가장 사랑하는 거야. 할로, 앞으로 너를 가장 많이 사랑하렴. 그리고 나중에 할로에게도 귀여운 아가가 생기면 그 아가를 가장 사랑해 주렴. 엄마처럼. 그전까지 할로는, 할로를 가장 사랑하는 거야. “
나는 우리 딸이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자랄 수 있을지 잘 모르는 어설픈 초보엄마는 주문을 외우듯이 아이에게 말했다. 너를 가장 사랑하렴.
얼마 전 할로가 내 눈을 한참 바라보길래,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할로, 어렸을 때 엄마가 했던 말 생각나?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있다는 거. ”
“응. 생각나. “
“엄마 눈에 지금 누구 들어있어?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들어있을 걸. ”
“할로 들어있네. ”
“맞아. 엄마는 여전히 할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우리 할로 눈엔 누가 들었나. 가서 거울보고 올래? ”
“후. 엄마. ”
옛날 같았으면 쪼르르 거울 앞으로 달려갔을 텐데. 웬 한숨.
“엄마. 뭐가 보이긴. 내 눈엔 내가 보고 있는 게 보이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
이야. 너 진짜 많이 컸다. 이제 엄마의 마법주문은 효력이 다 했나 보다. 그 옛날이,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은 그 옛날이 아련하네.
그 아련함과 그리움이 너무 넘쳐서,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이 말이 하고 싶었는데.
알아. 엄마도. 엄마가 보고 있는 게 보이는 거지. 근데 엄마 눈엔 늘 할로가 들어있어.
왜냐면 엄마는 우리 할로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싶어. 네가 태어나고 너를 키우면서 경험하는 세상은 엄마가 이전에 알고 지냈던 그 세상이 아니더라.
너를 통해 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야.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T 엄마를 F로 변신시키는 마법이구나. 엄마는 이 마법이 풀리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