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주 잊을 수 없는 이름.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당시 인구가 폭발하던 시절에 태어난 탓에 한 반에 약 70명 이상, 그런 학급이 한 학년에 20반까지도 있던 학교에 다녔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급우들이 대거 모르는 얼굴로 채워지곤 했는데 경주는 처음부터 그렇게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경주를 처음부터 좋아했다.
경주의 여동생도 같은 학년 다른 반에 다니고 있었다는것 외에도 경주는 뭔가 남다른 면이 있었다.늘 차분하면서도 아이들을 이끄는 힘이 있고 그렇다고 너무 튀지도 않는, 매우 여성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따르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급기야 남자들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하더니 2학기 반장으로 선출이 됐다.
내 마음은 절대 모를 거라 믿으며 편하게 대했던 나는 그런 경주가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거 같다. 처음부터 경주를 좋아했던 건 나였는데.. 그 애의 자리를 맴돌며 그저 가끔 까르르 웃기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는데. 잘해주고 싶긴 하지만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애송이에 불과했던 나는그녀가 인기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 애의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과 미소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누가 경주랑 서로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퉁퉁하니 공부도 잘하고 여러 가지로 유복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나는 결국 질투의 화신이 되어서그 녀석에게 시비도 걸어보고 경주에게 삐딱하기도 하고. 그러다 정말 한심하게도 복도에 아이들이 꽉 차있는 혼란을 틈타 경주 몰래 뒤로 가서 엉덩이를 발로 차고 달아나기까지 했던 못된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짓만 하다가 어느덧 날은 추워졌고 그것은 곧 겨울 방학이 온다는 의미였다. 80년대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다. 최근 지구 온난화 탓에 바다의 온도가 오르고 근해 어종이 바뀌는 현상까지 보게 됐지만, 그 시절 겨울이 더 혹독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열악한 단열과 난방 시스템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면 당시 학교들은 창을 뚫어 연통을 설치하고 교실 한가운데 항아리처럼 생긴 시커먼 난로를 놨다. 그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 습도를 조절하고 양은 도시락을 올려 데우기도 하고 조개탄이나 왕겨탄을 주로 때웠는데 남자애들이 매일 창고에서 양동이로 땔감을 받아 왔다. 하루를 버티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선생님은 아이들이 먹고 난 급식 우유갑을 모아 모두 난로에 쏟아 넣곤 하셨다. 그렇게까지 해도 교실은 너무 추웠다. 아주 긴~ 겨울 방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겨울방학은 시작됐고 나는 매일 경주가더 그리웠다. 못되게 굴고 사과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멀어지는 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엔 외로움을 달래줄 만한 그 누구도 주위에 없어 겨울이 깊어질수록 그리움은 더해갔다.
그런데 다행히 주소록 같은 게 있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편지 쓸생각이 들었다. 그애 앞에선 용기가 안 났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내 마음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고백의 편지를 그렇게 날것으로 써본 것은. 몰래 엉덩이를 발로 차고 도망간 나쁜놈이 바로 나였다고 자수도 하고 진심으로 사과도 했다. 정말 그동안의 고백 성사를 하듯 줄줄이 쓰면서얼마나 솔직했는지, '네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 내가 먼저 좋아했었는데 너무 속상하다.' 라는 내용까지 적었던거 같다. 그런 민망하기 짝이 없는 편지를 적어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서 미련없이 보내 버렸다.
다음 날, 아니 그날 저녁부터 창피함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아니 이걸 어쩌지? 그 애 집 앞에서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기다렸다가 가로채 와야 하나? 하루하루 피가 말랐지만 개학은 다가오고 있었다.
인생을 돌아봤을 때 하늘이 도왔구나, 정말 기적이구나 싶을 만큼 좋았던 기억이 몇 번이나 될까? 재수 끝에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것도 다행인데 시험을 너무 잘 봐 장학금까지 받았을 때? 아니면 초보시절 겁도 없이 심야에 아버지 차를 몰고 나왔다가 택시와의 정면충돌을 겨우 모면했을 때? 취미로 그렸던 그림을 sns에 올렸다가 TV 출연까지 하게 됐을 때? 죽음을 모면했던 것은 그 무엇보다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 최초의 기적이다라고 느낄 만큼 기쁨과 환희에 찼던 일은 개학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경주에게 답장이 왔던 순간이다. 그것도 내 모든 창피함을 덮어줄 만큼 따뜻한 사연을 담고서.
누가 봐도 여자 아이인걸알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하고 동글동글한 글씨체로꼼꼼히 채워져 있던편지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엉덩이를 발로 차고 도망간 비겁한 놈이 나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스캔들은 전혀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는 것이며 자기는 그 아이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을 다시 읽어본 내용은 '희호야 나도 네가 좋아.'라는 엄청난 문구였다. 눈치가 없기로는 지금도 대단하지만 그땐 전혀 기대를 못했다. '나도 네가 좋아'라는 말이 1. 나도 너를 좋아해 왔어. 인지 아니면 2.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도 너를 좋아할 수 있어. 인지 3. 그냥 친구로서 난 너도 좋아해. 인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저 짧은 문구로는 분명하지가 않다.편지는불행히도 몇 년 후찢겨서 지금다시 엄중히 행간을 파악해 볼 수도 없다. 엉덩이를 발로 찼을 때 아파하던 그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내가 한 짓인지 알면서도 선생님에게 이르거나 나에게 와서 따지지도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쨌든 그 일로 나를 싫어할 법도 한데 나를 좋아하기까지 한다니 나는 그냥 1번으로 무조건 믿었던 것 같다.아름다운겨울이었다.
어른스럽던 경주는 그렇게 서로 마음만 확인하는 편지로 끝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도 했다. 개학하는 날 각자 선물을 준비해서 교환하자고 했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 용돈이 넉넉할 리가 없으니 생일 선물로 받았던 아끼던 학용품을 다 털어 선물을 준비했다. 기억나는 것은 뚜껑이 자석으로 닫히는 최상급 2층 필통에 연필뿐만 아니라 아끼던 샤프까지 채워서 별 포장도 없이 가방에 미리 넣어 두고는 개학날만을 기다렸다.
2월 중순경 겨울 방학이 끝나면 개학식 날 모여서 선생님 얼굴 한번 보고 방학숙제 내고 또다시 바로 봄방학이라는 이름으로 약 1주일 정도 방학을 했었다. 학교마다 조금 다를지 모르나 동장군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계절에 추운 교실에서 수업을 계속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그날을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거 같다. 경주와의 마지막 기억이 그것을 확인해 준다.
가방에 경주에게 줄 선물을 넣을 때만 해도 학교에 가서 경주를 반갑게 만나서 그냥 건네주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분명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긴 했는데 편지로 해서 그런지 그날 도저히 경주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 근처로 가지도 못했다. 경주도 나를 좋아한다고 화답을 했는데도 부끄러워서선물을 가방에서 꺼낼 엄두도 못 냈다. 게다가 인기가 많은 경주의 주변에는 늘 친한 여자애들 몇몇 과 남자애들까지 어슬렁 거려서 도저히 찬스가 안 났다. 경주역시 나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는 듯 나에겐 별 눈길도 안 주고 멀리서 즐거워만 보였다.
결국 난 가지고 갔던 선물을 꺼내보지도 못한 채 집으로 터덜 터덜 향했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녀석! 이게 뭔가 싶어울고 싶었다. 그런데 거의 집에 다 왔을 때 멀리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래 오르막길 초입에 한 여자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 오고 있었다. 경주는 아닌 거 같고.. 아! 경주랑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가 손에 뭔가를 들고뛰어 오고 있던 것이다. 쿵쿵 가슴이 뛰었다.
'경주가 이거 너 전해주래' 하고 돌아서서 가는 아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며 나도 가방에서 부랴부랴 준비했던 선물을 꺼내 주었다. 아이는 내 선물을 가지고 다시 왔던 길로 뛰어 돌아갔다. 경주는 어디쯤 있었을까?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웠다. 무기력했던 나와는 달리 포기하지 않고 선물을 전달한 경주는 역시 여러 면에서 나보다 나은 아이였다.
학용품 몇 가지와 꽃씨, 그리고 화선지에 그려 넣은 그림과 직접 지은 듯한 시 한 편.내가 보낸 선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구성. 꽃씨는 어찌할 줄을 몰라 제대로 심지도 못했는데 화선지에 그려 넣은 한 폭의 시화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소중한 것이라서 처음 받았던 편지와 함께 꽤 오랫동안 보관을 했다.
그림에는 한복을 입은 남자애와 여자애가 나란히 손을 잡고 둥근달을 바라보는 수채 물감 혹은 사인팬으로 그린 아주 안정된 구도의 그림이었다. 뒷모습이었지만 우리 둘을 그린 게 분명했을 그 그림의 여백에 시가 적혀 있었는데 기억나는 구절은 '저 둥근달처럼 우리 우정 영원히 변치 말자.' 란 내용이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어디쯤 경주의 바람대로 내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아직도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예상대로 6학년이 돼서 우리는 갈라졌고 그 후로 거의마주친 기억이 없다.
200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 나이가 30대 초반이 됐을 때 '아이럽 스쿨'이라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찾는 커뮤니티사이트가 대 유행을 했다. 나는 그곳 초등학교 게시판에 찾아가서 경주의 근황을 묻는 글을 혹시나 하고 올렸었는데 어느 날 경주를 안다는 다른 여자 동창에게 쪽지를 받았다. 경주는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으니 관심 끊으라는 듯한 내용이었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래도 좀 무안했다. 내가 뭐 어쨌다고.. 당시 동창들은 미혼이 많았던 터라 그곳의 분위기는 '티브이는 사랑을 싣고'라기보다는 '사랑의 스튜디오'에 가까웠던모양이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이가 있던 없든 그냥 경주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때도 컸지만 난 그 후로도 엄청나게 더 키가 커서 지금 보면 놀랄걸? 하며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을 보이고싶었을 뿐인데. 그럴 땐 연예인이 부럽기도 했다. 내 친구 꺼벙이처럼 연예인이 돼서 옛 친구를 소환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더라면 난 분명 제일 먼저 경주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물어봤을 것이다. 경주야 그때 그 편지의 의미는1번 맞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