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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Jul 24. 2016

꺼벙이

첫인상이 순하고 꺼벙해 보이는 녀석을 만나기 전과 이후로 내 인생은 달라졌다. 유약하고 이기적이던 나와 친구가 되어준 녀석 덕분에 난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더 가까이 다가갈 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서로 멀어져서 아쉽고 섭섭함도 있었지만 함께 했던 매일이 즐겁고 살아 있다는 행복을 깨우쳐준 친구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을 담아 써 내려가는 글이다.    


방송인이 되면서부터 마치 이민을 떠난 듯 화면에서나 안부를 전하던 꺼벙이는, 우연히도 내가 녀석과의 추억을 더듬는 글을 몇 자 적다가 잠이 든 날 새벽에 뜬금없이 내게 전화를 했다. 몇 년 만인지.. 처음엔 알람인 줄 알고 깼는데 시간이 이상해서 보니 부재중 전화였다. 새벽 2시. 반갑긴 했지만 잠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혹시 급한일이면 어쩌지? 몇 년이나 연락을 안 하던 친구에게 그럴 일이 뭐가 있겠냐만 잠결이라 분명치 않은 판단력으로 그냥 전화를 했다.


술에 취해 있었다. '허허.. 아직 젊구나.'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길 했다. 한놈은 술에 취하고 한놈은 잠에 취해서 곧 50인 남자 둘이 새벽에 그 옛날 소소했던 추억들을 나눴다. 궁금하던 아들 이름도 물어봤다. 그런데 녀석도 나랑 똑같은 소릴한다. '희호야 나는 너를 만난 뒤 인생이 달라졌어.'






둘 다 꺼벙하기도 하지만 키도 똑같이 크고 말라서 키다리나 꺽다리로 더 많이 불렸다. 희미한 표정에 안경까지 쓰고 다르게 생겼지만 이미지가 비슷해서 버스 안내양 누나가 (당시에는 버스 요금을 받는 빵모자에 회색 유니폼을 입은 누나가 뒷문 쪽에 있었다.) 둘이 쌍둥이가 아니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처음 만났던 건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눈이 오면 우리 집 앞 비탈길은 동네 아이들의 썰매장이 되곤 했다. 요즘은 그 수가 많아진 자동차들에게 골목을 내어준 지 오래지만 스키장이나 눈썰매장이 따로 없던 그 시절에는 눈만 오면 골목마다 적당한 비탈길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우리 동네에는 일회용 우산의 대나무 봉을 쪼개 불에 그을려 구부려 만든 대나무 스키가 대세였는데 점차 더 잘 미끄러지는 PVC 파이프 스키로 대체되었다. 스키라고 해봐야 반으로 갈라서 양쪽 발에 하나씩 눌러 타고 내려가는 게 전부였는데 가속도가 붙으면 꽤 빠르고 난이도가 높아서 고학년 아이들이나 가능했다. 탈 것 중 으뜸인 것은 적당한 크기의 판자에 PVC 파이프나 비닐 호스를 붙여 만든 눈썰매였다. 당시에 그런 썰매를 완제품으로 따로 파는 곳은 없었고 집에 손재주 있는 형이나 어른이라도 계셔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라 나는 한 번도 못 가져본 것이었다.


 그런데 눈이 온 어느 날 집 앞 비탈길에 웬 녀석이 그럴싸한 썰매를 들고 멍하니 서있었다. 인상이 순해 보여서 나도 한번 타보자고 했는데 처음 보는 내게 한두 번도 아니고 실컷 썰매를 타게 해 줬다. 당시 서울 변두리의 초딩들의 정서로는 처음 보는 녀석에게 뭔가를 선뜻 그것도 실컷 빌려준다는 건 요즘 말로 정말 대박이었다. 녀석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난 녀석을 바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끼던 책을 의심 없이 빌려줬다. 그런데 그날 이 후로 녀석은 눈에 안 띄었고 난 그대로 책을 떼일 판이었는데 6학년 반이 배정되어 가보니 녀석이 뒷자리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그 후로 하루도 떨어지지 않는 단짝이 됐다.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썰매를 타던날 느낌이 왔듯이 녀석은 역시 평범한 초딩과는 다른 면이 많았다. 누나가 둘이나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생각하는 스케일도 다르고 노는 것도 달랐다. 여러 가지가 기억에 남지만 지금 생각해도 특별하다 싶은 것은 동네에 다니는 버스를 목적지도 없이 그냥 타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어느 날 문득 그냥 동네를 지나는 시내버스에 올라타서 창밖 시내 구경을 하면서 종점을 돌아오는 녀석만의 독특한 소확행이었던 것이다. 나와 같은 반 단짝이 되고 나서도 내게 말도 안 하고 혼자 몇 번이나 그랬더랬다. 코스는 버스 노선 별로 다양했다. 326번은 여의도를 돌아오고 328번은 더 멀리 남대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조금만 주택가를 벗어나면 금방 논도 나오고 밭도 나오던, 말만 서울이지 촌이나 다름없던 동네에 사는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이 버스표 한 장으로 (당시 50원짜리 하나면 충분했을 듯) 볼 것 많은 도시를 가로질러 여행을 할 수 있던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평소 그렇게 활동반경을 넓힌 건 우리에게 큰 장점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덕에 동네에서 1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동생들까지 앞세우고 다녀올 수 있었다. 요즘은 대형 테마파크에 밀려 서울의 큰 공원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당시의 어린이 대공원은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과 견줄 수 있는 어린이들의 꿈의 놀이동산이었다. -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는 몇 년 후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에 개장을 했다-  부모님을 졸라도 겨우 갈까 말까 하는 그런 놀이동산을 친구 하나 잘 사귀는 덕에 몇 번이나 갔었다.


1반에서 1등이고 반장에 전교회장까지 하던 꺼벙이와 같이 한다면 어머니는 언제든 어디든 흔쾌히 밀어주셨는데, 각자의 동생을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에 가기로 한 날 기 눌리지 말고 놀라고 동생 몫까지 두둑하게 챙겨주신 용돈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왜 동생이 돈을 챙겼었는지 화를 내며 쥐어 박은 기억만 나는데, 그때 멘붕에 빠진 우리에게 꺼벙이는 흔쾌히 자기 돈을 반으로 쪼개서 같이 놀자고 했다. 조금 덜 타고 덜 먹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역시 초딩 답지 않은 스케일. 감동의 쓰나미.


그런 좋은 친구를 뒀어도 깨우치지 못하고 여전히 타인, 특히 내 손 아래 후배나 심지어 아들의 실수에도 관대하지 못한 내가 갑자기 부끄럽다. 특히 꺼벙이에게.


어쨌든 당시 세상이 덜 험해서 그랬는지 당시 우리의 활동반경과 스케일은 사교육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지금 애들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추억은 주로 이런 이벤트나 여자애들과 얽힌 기억 아니면 야구, 축구, 자전거 같은 동적인 것들이 많다. 윤석이는 우리 집에 있던 병아리와 강아지 이름을 기억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시간씩 하던 컴퓨터 게임, 그리고 음악에 심취했었던 것까지 섬세하고 감성적인 기억이 많았다. 

산울림과 각설이 타령, 그리고 손오공이 나오는 홍콩 영화의 커버 댄스를 둘이 같이 장기자랑으로 하기도 하고, 사춘기가 돼서는 우리 집에 있던 '퀸'이나 '웸' 같은 팝송 LP판도 많이 들었다. 그날도 분명 음악을 듣다가 전화를 한 거 같다. 이런 음악과 예능적인 자원이 내 덕분에 풍성해졌다는 얘기인건지. 무엇 때문에 녀석은 자기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한 걸까? 새벽까지 혼자 술을 마시며 과거에 몰입하는 친구는 요즘 잘 지내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윤석이는 나처럼 설명적이지 않다. 결국 즐겁게 같이 논 기억밖에 없다. 같은 곳을 가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노래를 하고. 한동안 연락을 못하던 중년의 두 소꿉친구가 새벽에 전화로 나눈 이야기는 이상도 꿈도 사랑도 아닌 결국 같이 즐거웠던 놀이들이었다. 즐거워야 할 인생이고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에 있어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들에게도 늘 얘기한다. 멍하니 서있던 그 녀석을 그때 못 만났으면 나는 어땠을까? 멀리 있어도 우리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살았다는 것을 느꼈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일을 하며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이젠 더 이상 둘이 쌍둥이란 말을 들을 일도 없지만, 그런 저런 선입관 없이 그저 50이 돼도 어렸을 때처럼 재미있는 뭔가를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뭐가 없을까? 지금 우리가 같이 나눌 수 있은 게 뭐가 있을까?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이가 얼마나 많을까?


녀석은 이제 와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왜 안돼? 하면 되지!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 틈틈이 기타 연습이나 좀 해둬야겠다.


그 시절 꺼벙이들은 다 잘 살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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