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엔 집에 전화가 울리면 동생하고 나는 귀를 쫑긋. 한발 늦어 부모님이 받으셨는데 누가 아무 말도 않고 끊어버리는 것만큼 심란한 일도 없었다.
전화 :글씨그림 #152
늦잠이 일상이던 대학생 시절, 어느 일요일에도 점심이 다 될 때까지 역시나 늦잠을 자다가 전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머니가 약간 상기된 음성으로 나를 깨우셨다. '어떤 여학생이 너를 찾는다!' 흔치 않은 경우였다. 재수 시절 짝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냥 아는 사이 정도로만 몇 년을 지내던 친구가 그날은 얼마나 심심했는지 처음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것도 내가 받지도 못해서 어머니와의 인터뷰까지 일괄로 치렀으니 청춘 가련 이미지의 그녀는 미처 몰랐던 당찬 조짐을 그때부터 보였다. 그 날 아버지는 흔쾌히 차도 빌려주셨다. 아들이 연애를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분간이 안되던 시절, 건조하기가 사막 같던 집에 걸려온 여대생의 수줍은 전화 한 통에 온 집안이 들썩였다.
지금은 핸드폰 없이 집을 벗어나면 불안해서 못 견디지만 아무 문제없던 그 시절에도 나름대로의 유용한 통신수단이 있었다. 눈만 뜨면 찾아가는 학교 근처 '까삐땅'이니 '샘터' 이런 호프나 카페 입구에는 예외 없이 메모판이 있었다. 늦거나 오랜만에 나타나는 멤버를 위해 일행이 쪽지를 남겨두면 별다른 약속 없이도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던 메모판은 지금의 단톡 방쯤 되지 않을까?
동아리방이나 과방에 있던 칠판이나 노트 한 권은 지금의 트위터나 페북 같은 sns 기능을 했다. 아무리 익명으로 적어도 글씨체를 숨기기는 쉽지 않으니 내용까지 더하면 누군지 거의 짐작이 가능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듯 소소한 단상을 끄적이길 좋아했다. 상상과 궁상이 함께 모락모락 피어나던 그 따끈한 글에 누군가 공감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AI처럼 빨간색 팬으로 틀린 맞춤법을 일일이 고쳐주는 여자 후배들이 꼭 나타나곤 했다. 입시공부에 찌들어 그래도 곧잘 한다고 대학에 들어온 동기 중에는 자기가 '맞춤법'에 약한지 '맞침법'에 약한 지도 헛갈리는 녀석도 있었다. 여자 후배들의 지적질에 굴복해 절필을 하는 예비역 오빠들도 속속생겨 나기도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글을 계속 적어나갔다. 지금도 메신저에서 지적질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젠 오타라고 둘러댈 수 있어서 좋다.
그 시절 동방 낙서장
핸드폰이 없던 시절 연락하는 방법은 또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남자가 압도적 다수인 공대와 여대가 흔히 조인트 MT를 가곤 했었다. 휴대전화도 없고 sns도 없던 시절 찍어둔 상대에게 에프터를 어떻게 했을까 싶지만 다 방법은 생기는 법. 연락하고 싶은 사람의 학교와 학과, 이름만 정확히 적어 학보를 교내 우체통에 넣으면 우표 없이도 정확히 배달이 되던 좋은 시스템이 있었다. 물론 간단한 메모도 어딘가에 같이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번호를 딴다는 표현은 없던 시절, 기다림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서로의 마음을 연결해주는 든든한 통신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