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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Jun 22. 2024

마음의 빚 1

어머니와 할머니

파킨슨 병이 심해지면서 어머니는 자꾸 할머니가 보인다고 하셨다.


어떤 할머니인지 여쭤보면 '니네 할머니'라고 하셨고 그건 아무래도 외할머니가 아닌 친할머니를 뜻하는 말 같았다. 처음엔 장난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자꾸 할머니 저기서 뭐 하시는지 가서 보라고 하시고 아까 여기 계시던 할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하시고.. 파킨슨병은 종국에 치매 증세를 동반한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친할머니의 기억은 당시 너무 어렸던 내겐 몇몇 스틸 컷처럼 남아있다.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되신 할머니는 막내아들인 아버지가 같이 모시고 살았다. 유년기를 보낸 당시의 집은 서울 화곡동에 방이 3개인 그 동네에 흔하디 흔한 단층집이었는데, 방 3개 중 구석방은 출입문을 별도로 내어 세를 주었고 안방에는 부모님이 건넌방엔 할머니와 내가 같이 지냈다. 노부모를 자식이 모시고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긴 했지만 며느리인 어머니는 넓지도 않은 집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동거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셨을 것이다.


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피신하셨던 나의 외할아버지 생사도 알 수 없이 해방 이후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 탓에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외삼촌과 함께 친척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자라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신여성이셨고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도 센 편이었다. 반면 친할머니는 근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한글과 산수를 스스로 깨우치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살림을 하면서도 혼자 여관을 운영하실 정도로 똑똑한 분이셨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많이 여린 분이셨다고 아버지는 회상하시곤 했다.


그 고집을 물려받은 나 역시 어머니에게도 자주 고집을 부리다가 구두 주걱 같은 걸로 매를 맞곤 했는데, 어머니가 참다가 결국 회초리를 찾으러 움직이려는 순간 나는 쪼로로 할머니 방으로 도망가 숨어들었고 어머니는 아랑 곳 않고 할머니 방을 쳐들어 와서는 보이는 대로 나의 몸에 매질을 했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온몸으로 혹은 이불로 나를 감싸 막아주셨다.


그런 식으로 매질을 하다 보면 할머니의 몸에 회초리가 닿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독한 며느리는 손주에 대한 할머니의 평소 무분별하고 과도한 사랑이 오히려 손주에게 독이 된다며 늘 할머니와 각을 세웠었고, 분명  역시 우리 집의 고부 갈등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 후로 40여 년이 흘러 내가 아이를 낳고 같이 사는 동안 어머니도 당신의 며느리에게 비슷한 소릴 듣고 계신 걸 볼 때면 나는 참 마음이 미묘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착한 품성도 있으신 분이시라 할머니에게 늘 차가웠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환갑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생활비를 쪼개 당시엔 구하기 쉽지 않았던 겨울 코트를 맞춤으로 선물하시기도 했다. 옷이 집에 도착한 날 쑥스러워하시는 할머니를 앞에 세워두고 어머니가 직접 옷을 입혀 드리면서 뿌듯해하시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어린 시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을 터이고, 마음이 여린 할머니와 할 말 다 하는 신세대 며느리 둘 사이에는 늘 차가운 기류가 흘렀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누구의 편도 일방적으로 들지 않고 적당히 지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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