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아이패드 드로잉과 에세이 강좌를 듣는데 신기하게 두 강좌 다 첫 번째 수업 때 좋아하는 것을 쓰고 그려보라 숙제를 내주셨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아이들이지만 이상하게 매일 '사네~ 못 사네~' 하며 아옹다옹하는 남편을 그리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낳기 전에는 늘 남편을 그렸었는데 아이들을 낳고서는 왜 이리 밉살스러워졌는지 아마도 부모라는 직업이 처음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그랬을 것 같다. 점차 아이들이 자라면서 마음에 바람이 드나들자 뻑뻑해서 보이지 않던 남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홀로 사슴처럼 뛰어다니던 소년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어깨 가득 다른 이들의 삶을 짊어지고 한 발짝 내딛기도 힘겨웠을 텐데 오히려 아내인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의 짐을 무겁게 앉히고 매서운 말로 채찍을 휘둘렀다.
올해로 그와 알고 지낸 지 14년째다. 처음 높은 산 위의 단단한 바위 같던 사랑은 아래로 굴러 부서지고 깎여 바닷가 모래처럼 다른 형태의 사랑이 되었다. 그동안 함께였던 날보다 떨어진 날을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언제나 꼭 붙어서 일 그리고 육아와 살림을 함께 했더니 이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참 오랜 시간 쏟아지는 폭풍우에 잠겼었다. 우리 서로 내리는 서리에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앞으로 떠오를 해와 무지개 그리고 모든 나날을 손잡고 보고 싶다.
작업 노트
남편을 그리기 위해 스마트폰 갤러리를 넘겨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낳은 후부터 남편과 내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찍어둔 사진도 없으니 남편을 그리려 며칠을 찬찬히 바라보는데 그동안 차갑게 느꼈던 남편과 다르게 눈 속에 사슴을 닮은 소년이 보였다. 밤하늘을 동경하는 소년의 주근깨가 수없이 뿌려진 별처럼 반짝거렸다. 우리는 나이 듦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맞는 옷을 입고는 있지만 실은 숲속의 사슴처럼 태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어느 날 우리가 하얗게 세면 함께 손잡고 어둠에 들어가 쏟아지는 별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