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남편에게 일이 없었다. 그의 직업은 그림을 그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데 몇 달째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갑자기 일이 끊겨 몹시 불안했겠다며 걱정하겠지만 정작 우리는 담담했었다. 오히려 주위에서 그의 그림을 알아볼 정도로 일이 많았을 때 남편은 항상 불안해했었다. 첫 아이인 예솔을 낳고 남편은 일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며 들어오는 일을 다 받아서 밤낮없이 의자에 묶여 살았었다. (지금도 묶여 있지만….)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무언가에 자신을 묶어두고 두 눈에 빨간 불을 켰었다. 일상에 쉼표를 찍으려는 나에게 멈출 수 없다며 빨간 눈으로 차갑게 쏘았지만, 오히려 무언가가 끊어주기를 기다리는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느닷없이 일이 끊겼을 때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분명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도 온몸에 긴장의 끈이 탁! 풀린 것처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린아이 같아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안식년’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금이 누군가가 그에게 주신 안식년 같았다. 그런데도 태생이 부지런한 사람이라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일을 만들어서 했지만, 그동안 그리고 싶던 그림을 그려서인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에서 느껴졌었다.
다시 남편에게 일이 들어왔다. 이제는 단단히 굳어져 펴지지 않는 구부러진 등으로 자리에 앉아 거북이처럼 긴 목을 쭉 빼고 다시 두 눈에 빨간 불을 켠다.
“턱! 목구멍에 걸려 삼켜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켜내는 것처럼 그림 일하고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들었던 날. 맥주 한 잔 마시며 힘겹게 털어놓은 남편의 이야기에 찌잉~ 가슴이 울렸다. ‘그렇구나. 정말 괴롭겠구나. 삼켜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켜내야 살아지는 것처럼 그려지지 않는 그림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 일하고 있구나.’ 어쩌면 어렴풋이 나는 그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 낳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둔 나의 선을 그리고 싶어서 또는 만일 내가 일한다면 잘 할 수 있을까 미리 두려워서 온갖 핑계를 대며 애써 모른 척을 했었다.
한참 꽃향기에 취해 꽃만 따느냐고 정작 매야 할 밭을 못 매었다. 이제 온갖 꽃으로 마음을 풍요로이 채웠으니 남편과 함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려 쌀통을 채워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