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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 큰 나무의 미혜 Jan 08. 2023

오늘부터 예솔은 아홉 살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

 "아홉 살이 되잖아!"

 "아!"

 내가 낳은 아이가 아홉 살이라니 뭔가 굉장했다. 가슴에 묻혀 모유를 먹던 게 어제 일만 같은데 이제는 안으면 훌쩍 길어진 팔다리가 엄마 품을 벗어난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예솔은 다가올 나이를 기대했었다. 초등학교에 가서 처음 만날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새로울 시작에 설렜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등학교 1학년의 일상도 그리 별다른 바 없었다. 오히려 마음 같지 않은 일들에 상처받고 실망했다. 매일 같은 시계 속 바늘이 되어 제자리 뛰는 나날에 지쳐갈 때쯤 리셋 버튼이 눌러진다고 하니 2학년이 되면 새 친구를 사귀고 싶다며 꿈같은 미래를 그린다. 물론 새로운 해가 떠올라도 여전히 똑같은 시계 안을 맴돌겠지만 똑딱거리며 바삐 내리 오르는 횟수만큼 시간의 농도는 짙어지겠지? 그렇게 예솔은 누군가 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을 느낄만한 나이라는 아홉 살이 될 거다.


 "내일 꼭 떡국 끓여줘!"

 "왜?"

 "떡국 먹어야 아홉 살이 되잖아!"

 후훗,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 줄로 아는 걸 보니 아직은 여덟 살인가 보다.

 "알았어. 끓여줄게!"

 "엄마는 내년에 마흔한 살이지?"

 허억! 질문이 펀치처럼 날아왔다. 다가올 나이가 충격이라니, 앞으로 한동안 반가울 아이의 나이와는 다르게 내 나이는 더 손가락으로 꼽고 싶지 않다. 돌이켜보면 언제부턴가 새해에 들뜨지 않는다. 그냥 같은 동그란 하루를 이어가는 보통날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몇 세부터 나이 드는 게 싫어졌을까? 지나가는 시간의 바늘이 주름이 되어 얼굴에 선명히 새겨지던 순간부터 좀 별로였을까? 느닷없이 궁금해져 과거의 시점으로 촤르륵 머릿속 필름을 넘겨봤다. 그랬더니 기억은 손목을 잡아끌어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세운다. 나는 아이를 낳고서부터 신년이 무서워졌다. 그전에는 예솔처럼 두근거리며 흰 종이 위에 원을 그려 숫자마다 칸칸이 꿈을 적었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일 년을 계획하면 마치 다 이루어질 것처럼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육아는 바늘이 되어 떠오르는 나를 터뜨렸다. 아이들은 자주 아팠고 계획은 내일로 미뤄지다 결국 하얗게 지워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뿌연 안개처럼 다가오는 앞일이 두렵다. 그저 아이들이 새 학년에 잘 적응하기를, 아프지 않기를,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을 보통의 나날만 이어지기를, 연필을 들어 계획을 적는 대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그럼에도 계획을 세웠다. 소리 없이 캄캄한 밤, 갑자기 눈이 떠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잠들었구나. 그래도 지나가는 2022년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 슬며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시계를 봤더니 12시 5분 전, TV를 켜고 볼륨을 줄였다. 네모난 화면 안에 수많은 사람이 보신각 앞에 모여 인생의 책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쓰려는 듯이 스마트폰을 높이 들었다. 5!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함성과 함께 새날을 여는 종소리가 밤하늘을 환하게 채다. 그때 나도 스마트폰을 켜고 계획을 적었다. 앞날은 밤처럼 어두워 보이지 않지만, 꿈은 늘 귓가를 속삭여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흔한 살의 꿈을 꾸역꾸역 눌러썼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그동안 달력의 숫자에 빨갛게 이어 나간 선처럼 그렇게 최선을 다할 테니 괜찮다, 괜찮다, 주문처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 둘, 꾹꾹 눌러 담았다. TV 속 종소리가 반짝이는 별의 노래가 되어 울림이 잦아들 때쯤 해는 떠올랐다. 나는 어제처럼 따스한 온수매트 위에 누워있었다. 아이들은 엄마 옆에 동그랗게 몸을 웅크려 꼭 붙어있었고 뽀글뽀글 떡국을 끓이는 듯한 따스한 소리에 집안은 온기가 감돌았다. 아! 1월 1일이구나! 벌떡 일어나 남편의 상차림을 도왔다. 반찬은 김치 하나에 떡국 네 그릇뿐인 소박한 밥상이지만 왠지 경건하게 느껴졌다. "나, 떡국 먹었으니깐 이제 아홉 살이야!" 어느새 떡국 한 그릇 뚝딱 비운 아이가 나이도 한 살을 더 먹었다며 기뻐한다. 그래! 오늘부터 예솔은 아홉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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