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 큰 나무의 미혜 Nov 28. 2023

다시 돌아왔어

 


 시간은 겨울을 향해 달리는데 오늘도 느린 나는 가을을 기록한다. 그리움일까? 후회일까? 이토록 쉬이 넘겨지는 세상에서 홀로 넘겨지지 않는 책을 읽는 이의 심정이란... 언젠가 하얀 종이 위에 '이제부터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싶다.'라고 꾹꾹 눌러 쓴 적이 있었다. 그때 달팽이처럼 생긴 느린 과거가 스멀스멀 기어와 아직도 바꾸지 못하는 시간을 고민하느냐며 핀잔을 줬다. 그러게.. 글을 쓰지 않았더니 어느 시제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것 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과거를 향해 다이빙하잖아?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 찌르르한 통증에 온몸이 아렸다.


 "마흔이면 젊지!" 흐릿한 나이를 선명히 기억하는 이들이 머리를 처박고 괴로워하는 여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요? 이미 지난 당신에게는 나의 늙은 지금이 그리도 젊디젊은가요? 진흙에 빠진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얼굴을 뒤덮던 진갈색 흙이 흘러내렸다. 언젠가 와봤지만, 한 번도 온 적 없던 세상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타원형의 커다란 거울이 옆에 놓여있었다. 여인은 애써 피하던 자신을 마주 보게 되었다. 기억 속 앳된 얼굴은 주름으로 난도질 되어 흡사 노인과 같았다. 거울 속에 한 줄 더 새겨지는 주름을 슬슬 문지르며 사춘기 소녀처럼 왜 태어났을지 물었다. 글쎄.. 살아있으니 살아가야겠지. 날개가 있으니 날아가는 새처럼. 거울 뒤로 나이 든 새 한 마리가 웅크린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접혀있을 땐 몰랐는데 날개를 펼치자, 세상을 덮을 만큼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새는 자연스레 날아가는 무리 앞으로 날아올라 힘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어디로 가나요? 그 날갯짓이 너무도 경건하여 따라가려 했지만, 몸이 진흙에 파묻혀 빠지지 않았다. 순간 전신이 덜덜 떨렸다. 맞다! 지금은 겨울이었지! 그때 다시 달팽이가 나타나 어리저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지. 달팽이의 더듬이가 분명히 시침과 분침처럼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데도 시간은 자꾸 자꾸만 거꾸로 흘렀다. 지금을 과거로 사는 건 고통이야. 더는 그만하고 싶어. "이제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할래!" 여인은 안간힘을 쓰며 진흙에 박힌 손을 빼냈다. 그녀의 손에는 연필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굳은 손가락을 힘겨이 움직여 쫓아가려던 새를 하늘에 그렸다. 그러자 그림은 진짜 새가 되어 진흙에 갇힌 여인을 끌어내었다. 나는 연필을 쥐었으니 그림을 그릴래. 여인은 하늘로 날아오르며 자신이 담겼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있을 땐 전부 같더니 멀리서 내려다보니 한없이 작아서 보잘것없이 하찮았다. 오래 참았던 과거가 두 눈에서 떨어졌다. 눈물은 하얀 눈이 되어 까만 진흙 위로 쌓여갔다.


 시린 눈물을 떨어내자 읽히지 않던 책이 보였다. 다시 돌아왔어. 시선을 옮겨 바라본 손에는 연필이 꼭 움켜쥐어 있었다. 쓰라린 시간의 늪을 지나 드디어 지금에 다다랐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도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연필을 잡고 있으니 그림을 그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의 빈 페이지에 그토록 그렸던 새의 비상을 찬찬히 새기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잊히더라도 잊기 싫은   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