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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Jul 22. 2018

5. 저곳에 없는 유일한 한 가지, 내 책상

* 본 글은 이 전에 연재했던 <80년대 태어난 김지영 씨들>를, 에세이 <나는 슈퍼 계약직입니다>에 넣기 위해 다시 썼다가, 분량이 넘쳐서 빠지게 된 글입니다. 흙흙. 역시 이 글이 돌아올 곳은 '브런치'였나 봅니다.



  Y와 나는 필리핀에서 만났다. 때는 11년 전으로,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꿈이나 목표가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학연수가 가고 싶었다. 대학에만 가면 다 할 수 있다더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생계 체험 맛보기가 가능한 아르바이트뿐이었다. IMF가 지나간 후라, 우리 집도 그랬고, 친구네도 그랬고, 무너진 경제상황을 회복되지 못한 가정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싱싱한 청춘의 시간을 그렇게 양보해야 했다.   

  그래서 꼭 어학연수를 가야 했다. 유럽은 못 가더라도 가까운 동남아라도 가는 것이, 나의 청춘과 돌아오지 않을 대학 시절에 대한 배려라고 믿었다. 알바로 모아둔 쌈지돈은 그렇게 세상은 빛을 보게 됐다.


  나는 2주간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말이 어학연수지. 어학 여행에 가까웠다. 아니다. 결국, 한국 사람들과 2주간 열심히 놀다 왔으니까. 그냥 여행이었다.   




  당시 필리핀 어학연수가 유행이었다. 그래서 꽤 유명한 어학원이 많았는데, 나는 작은 건물 안에 숙소와 강의실이 모두 갖춰진 소규모 어학원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렴한 가격에 숙식, 교육, 여행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겨울방학이 성수기라던데, 도착한 어학원의 학생은 7명뿐이었다. 그중 몇 명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이도 비슷했고, 모두가 곧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우울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Y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레벨테스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높은 단계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새벽에 옥상에 모여 맥주를 마실 때, 그녀는 새벽까지 공부했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또 공부했다. 거기서 또 잠을 줄여 우리와 쇼핑과 수영을 함께 다녔다.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는 상냥한 아이였다.    

  짧은 2주였지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 만큼 친해졌다. 그리고 이 모임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는데, 지금도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 겨울이 지나기 무섭게, 졸업만 앞둔 마지막 겨울방학이 왔다. 기분 탓인지. 그 겨울은 유독 매서웠다. 그런데도 우린 한파를 뚫고 모임을 이어갔다. 그날은 강남역 빌딩 숲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만났다. 9,900원에 3가지 안주를 고를 수 있는 호프집이었다. 우린 김치전, 탕수육, 황도를 주문했다. 지금 생각해도 형편없는 맛의 음식이지만, 당시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과분한 호사였다. 게다가 거긴 강남이 아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 5명이 맥이 풀리고 비틀거릴 정도로 취하는데, 4만 원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취해서 거리로 나온 우리는 헤어지긴 아쉽고, 한 잔 더 마시기에는 돈이 부담되는 어정쩡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때였다.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려왔다. 바로 내 옆에서,       


  “이게 말이 되냐? 빌딩이 이렇게 많은데! 저 안에 내 책상이 하나 없다는 게? 더럽다! 치사하다!”        


  Y였다. 평소처럼 말 없고 잘 웃던 그녀가 한껏 취하자 돌변했다. 술은 그녀에게 3단 고음을 선물했고, 민망함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피식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곱게 무시한 Y. 그녀는 한참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 고개를 뒤로 떨구고 하늘을 노려봤다. 아니었다. 하늘인 줄 알았는데, 하늘을 가린 빌딩들이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위를 올려다봤다. 늦은 밤 올려다본 빌딩은 선명한 낮보다 더 높고 더 으리으리해서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녀도 나도 우리 모두, 그랬다.       




  사실 나는 그녀가 언젠가 저런 비슷한 행동을 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Y의 고향은 경상도의 작은 도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기 전까지, 서울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서울도 대학도 전부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신세 한탄을 한 적은 없지만, 습관처럼 조용히 내뱉는 그녀의 말끝에는, 서울과 대학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묻어 있었다.     


  “장학금 받고 들어오면 학교는 거저 다닐 줄 알았는데, 재료비부터 생활비까지. 여기서 버텨내는데 일 년에 돈 천만 원이 깨지네! 필리핀도 내가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갔잖아. 덕분에 학기 중에 4시간 이상을 못 잤지. 누가 제발 이걸 악몽이라고 말해줘.”    


  Y가 이 악몽을 견뎌낸 건 순전히 부모님 때문이었다. 동네에서 꽤 공부를 잘했던 그녀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너 때문에 산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악몽 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아니 견뎌야 했다.    


      



   나에겐 그저 ‘어학 여행’이었던 2주간, 죽도록 공부했던 Y. 그녀는 늘 악착같았다. 낮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학원 강사를 하고, 새벽에는 학교 과제를 했다. 아르바이트 좀 한다고 생계 체험이니 뭐니, 죽는소리하는 나와는 달랐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5명 중 제일 먼저 취업을 하리라 믿었던 Y는, 졸업할 때까지 취업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우리 중에 그녀만 취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손꼽는 대기업만 지원하다가, 나중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중견기업에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합격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취업 재수할 시간에 공무원을 준비하는 게 좋겠더라고.”      


  졸업과 동시에 Y는 노량진에 입성했다. 그리고 하루 18시간. 고시원과 학원을 오가며 공부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한 3년간은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다. 오롯이 시험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부모님은     


  “우린 너 때문에 산다.”    


  라는 말 대신     


  “우린 너 때문에 걱정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딸’이 아닌 ‘부담스러운 딸’이 되어갔다. 임용고시에서 3번째로 불합격한 날부터, 그녀는 구직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노량진 고시원에서 강남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국계 패션 회사의 인턴으로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에 18시간씩도 공부했는데, 9시간 앉아서 일하는 것쯤이야.’라고 생각했다. 출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자신감으로 시작된 회사생활은 만만찮았다. 평일 야근은 기본, 주말 근무까지 버텨야 했다. 그러나 강도 높은 근무시간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관리자의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사실 Y는 먼저 취직한 친구들이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공감하지 못했었다. 대학 시절 내내 학원 강사로 일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사회생활이란 원래 눈치 보이고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저 친구들이 나약할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물여덟의 인턴은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했던 3개월의 인턴 기간이 끝났다. 그 후 그녀는 ‘일단 계약직’이 됐다. 면접 때 정규직 전환을 고려하겠다던 회사는, 아직 Y를 이 회사의 직원으로 채용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일단 계약직과  2,000만 원이 조금 넘는 연봉과, 1년이란 시간, 모두를 흔쾌히 수용했다.     



   

  외국계 회사에는 해외 유학파가 많았다. 모두 영어 이름을 썼는데,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어 반, 영어 반을 썩어 대화했다. 웃자고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쥐~나 씨. 이번 프로젝트 뤠귤러하게 가는 거니까. 우리 임플로이 미팅 때, 세일즈 디팔드먼트에서 팔로 업할 수 있도록. 잘 익스플 래잉 해줘요. 그리고 이건 마이너 한 부분인데 더블 체크할 수 있게 메일로도 내용 리마인드 시키고요.”    


  2주간의 필리핀 어학연수가 전부였던 Y는 다시 영어공부에 열을 올렸다. 가장 신경 쓰이는 영어 발음은 관련 수업이 있는 어학원까지 등록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졸업하면 해야지, 취업하면 해야지, 임용고시 붙으면 해야지, 정규직 되면 해야지, 하며 보낸 시간이 8년이었다.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는 남자가 없던 건 아니었다. 그저 연애 세포가 없다고 믿었다. 정확히는 그런 세포 만들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학원에서 만난 그 남자의 호감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미루고 기다려봐야 손해였다.

   



  6살 연상인 그녀의 첫 남자 친구는 만난 지 6개월 만에 청혼했다. 부모님이 자꾸 결혼하라고 한다. 명절에 친척들이 자꾸 언제 결혼하냐고 묻는다. 회사에서 이제 노총각이라 부른다. 만날 때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남자 친구를 보면서, 예상했던 일이었다.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지만 말이다.   

  ‘일단 계약직’이라 망설여졌지만, 결혼을 결심했다. 누군가 옆에 있어 준다면 더욱 힘이 날 것 같았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Y는 고심 끝에 동갑내기 상사에게 먼저 결혼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상사는 진심을 담은 환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어머, 진짜? 너무 축하해. 근데 아쉽다. Y 씨랑 더 오래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축하 메시지와 함께 비슷한 말을 했다. 황당하고 서운했지만 ‘아닌데요. 저 계속 회사에 다닐 건데요.’라고 말하면 안 될 같았다.


  1년을 채우지 못해 퇴직금 없이 퇴사를 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직장생활이 됐다. 결혼 후, 취업 준비를 하다가 임신을 했다. 입덧이 심했지만 서류전형에 통과된 회사의 면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임신했다는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면접관 탓인지. 그 뒤로는 이력서를 넣지 않았다. 시댁과 친정 모두 지방에 있고, 남편의 벌이가 나쁘지 않으니. 일단 내가 키워야지, 했던 게 4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건 1년 전 강남역 근처였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복잡한 길에 멈춰서 대화를 나눴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녀가 차분하게 읊조렸다.      


  “나 학교 다닐 때 학점도 좋았고, 지금도 영어 잘하거든. 일만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 내가 일할 책상이 없네. 이렇게 회사들이 많은데 말이야. 지금까지 뭘 했고, 앞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Y는 언젠가 술이 취했던 그 밤처럼, 거리의 빌딩들을 올려다봤다. 선명한 낮에 보는 건물도 으리으리해서 주눅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Y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황을 설명한 후 그녀가 안타깝고 걱정된다고 말하자. 남편이 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 옛날에 술 취해서 소리 지른 사람 너지? 그렇게 술주정할 사람 너뿐인 것 같은데….”       


  '이봐. 이 얘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하려다 참았다. 뭐, 저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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