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였다. 이미 수정 중인 콘텐츠가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빠듯한 날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걸 만들어내라니. 또 일거리를 들고 퇴근해야 했다. 대체 몇 주째야.
“미친놈들 갑질도 정도껏 해야지.”
사무실을 나와 편의점에서 과자를 잔뜩 샀다. 돌아오는 길에 욕이란 욕은 다 했다. 평소 나라면 이쯤에서 풀려야 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른 뜨겁고 불쾌한 감정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라서 주말 내내 화난 사람이 되어버렸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화날까.
“그냥 이혼해!”
결국 주말에 사소한 문제로 남편과 다퉜다. 홧김에 이혼하자고 했다. 그날 우린 따로 잤다. 나는 홀로 침대에 누워 그에게 서운하고 화났던 일들을 곱씹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났을 때, 이해되지 않았던 건 남편이 아닌 나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혼이란 단어는 왜 튀어나온 걸까.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사소한 불만이 있지만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결혼 5년 차인 지금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즐겁다. 문제가 있다면 그쯤 매일 집으로 회사 일을 가져간 나였다. 힘든 것인지 화난 것인지. 나조차도 내 마음이 읽히지 않았다.
이천십팔년.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 무서웠다.
지난해. 그러니까 2018년. 나는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가장 큰 원인은 회사였다. 매달 무례한 사람들과 무리한 업무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이사 문제까지 겹쳤다. 대상포진, 공황장애, 탈모 등. 스트레스로 인해 몸 상태가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일은 계속됐다. 한날은 출장이 있었다. 오전까지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가 떠나는일정이었다. 도착한 곳에서 새벽 1시까지 일하고 근처 호텔에서 잠을 자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현장에 가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오후 7시까지 일했다.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많은 나는, 되도록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런데 일이 끝날 때쯤
“멍청한 사람은 일을 힘들게 생각해. 능력 키워서 연봉 올리고 성공할 생각은 안 하고. 그렇지 않아? 하루 씨?”
더는 웃을 수 없던 내게 부장님이 말했다. ‘힘들다고 멍청해지려는 건 아니지?’ 삐딱하게 해석되는 그 말에 참아왔던 감정이 왈칵 쏟아졌다. 순간 “그래서 당신은 성공한 게 겨우 그거야?”라고 물어볼 뻔했다. 울컥하는 사이 부장님은 사라졌다. 애초에 내 대답을 듣고자 했던 말이 아닌 듯했다.그리하여 갈 곳을 잃은 분노는 뜬금없는 곳으로 향했다.
“대체 언제 와? 빨리 좀 와.”
“왜 자꾸 전화해서 사람을 힘들게 해!”
때마침 전화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엉엉 울었다. 당황한 그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힘들어’라고 말하기 싫었다. 꼴사나운 분노를 느끼는 내가 창피하고 비참했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나도 모르는데 남편에게 찾아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 몇 달간 불안하고 우울했다. 웃을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릴 땐 어지러움을 느꼈고, 버스를 탔을 땐 매스꺼움을 느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식탁에 앉아 일을 했다. 가끔 사무실에서 호흡하는 게 힘들었고, 주말에도 자면서 식은땀을 흘렸고. 월요일 아침에는 두통이 밀려왔다.
“회사 관둬.”
요즘에도 그런 회사가 있냐. 나라면 관둔다. 당장 이직해라.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라.
주변에서 퇴사를 권했다. 일리 있는 조언이었다. 회사를 관두면 분명 몸과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편안함은 곧 무력감으로 바뀔 것이고. 무력감은 더 큰 우울과 조바심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이런 일을 최소 네 번 이상 경험했다. 업무환경과 사람이 만족스러웠던 회사는 없다. 처음에는믿음직하다가도, 결국에는 실망하고 미워지는 게 회사였다. 그저 사람들이 좀 괜찮았던 곳, 그나마 일이 나와 잘 맞았던 곳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퇴사하고 싶지만, 월급은 받고 싶어.’
돈을 벌어야 해.
남편이 벌어오잖아. 아껴 쓰면 외벌이도 충분해. 네가 욕심이 많네. 요즘 대출 없는 집이 어딨느냐.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면 이런 반응이다. 이럴 때면 나는 입을 꾹 닫는다. 매달 10일 내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돈이 아니다. 안도감이었다. 아주 잠깐 불안감을 덜어주는 숫자였다.
퇴사 대신 더 많은 글을 썼다. 나를 정리하기 위해 썼고. 나에게 묻고 싶을 걸 썼다. 답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몸은 천천히 회복됐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던 여러 가지 증상이 사라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마음도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아질 뿐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것뿐이었다. 숨어있던 감정이 튀어나온다거나. 불안과 우울한 감정으로 잠들지 못할 때도 더러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던 나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결정적으로 한 달 전, 남편에게 이혼을 외쳤을 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내 감정과 마주하기로 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내 안에 방어기제가 거부하는 기억과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를 찾기 위해 전문가 질문에 답해보기로 했다.
심리상담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글의 원제는 <울고 싶지만, 치킨은 먹고 싶어>였습니다. 노골적이라 바꿨지만요.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