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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Aug 24. 2018

그래서 정규직이야?

* 이미지 출처: 윤태호 작가님 웹툰 <미생> 중



  “그래서 정규직이야?”


  이해한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생긴다는 거. 나도 그렇다. 그러니 이해는 된다.     




  열심히 노력한 당신. 대기업 채용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신 후 다시 마음을 잡고 도전한 끝에 중견 기업에 입사했다. 월급은 좀 적지만 “어느 회사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면, 10명 중 9명은 아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회사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특히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상사와 대표의 컬래버레이션과 ‘동호회’라고 쓰고 ‘주말 근무’라고 읽는 복리후생은 최악이다.


  그렇다고 사표를 쓸 수도 없다. 취업했다고 거들먹거리며 지른 자동차 할부가 47개월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상사가 담배를 태우러 가는 시간을 이용해 구직 사이트를 뒤적거린다. 괜찮은 채용공고를 발견한 날에는 정성스럽게 지원서를 작성하느라 새벽에 잠이 든다. 그런데 매번 불합격이다. 혹시라도 면접을 보게 될 때면,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의 장례식을 만들어 반차나 연차를 써서 기어코 갔다. 그런데 또 불합격이다. 답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다. 그날은 소식이 뜸했던 친구 A도 왔다.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는 당신보다 공부도 못했고, 운동도 못했던, 좀 어리숙한 녀석이었다. 자기가 짝사랑하던 여자가 당신에게 고백했다고 해도 잘해보라고 응원하던 녀석이었다. 그래도 밝고 착해서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한 후 연락을 못 하고 지냈으니 9년 만의 만남이다.


  “나 S그룹에 다녀.”


  근황을 묻던 중 “회사는 어디냐?”는 당신의 질문에 A가 답했다. 순간 심장이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추락해버린다. S그룹이라면 당신이 얼마 전 지원서를 냈다가 서류 전형에서부터 불합격한 회사다.



 

  A는 그저 그런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바닥으로 추락했던 심장이 다시 기어 올라와 요동친다. 두근두근. 못난 질투심이 꿈틀댄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주를 한 잔, 두 잔, 석 잔…. 그러다 한 병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올수록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S그룹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명문대 졸업생도 들어가기 쉽지 않은 곳이니까. 그런데 A가 들어갔다고? 나름 알아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와 자격증, 그리고 다양한 활동으로 스펙을 무장한 당신도 뚫지 못한 성지를, 쟤가?


  당신은 눈으로는 A를 살피고, 머리로는 A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눈으로 살펴본 A의 외모는 확실히 예전보다 나아졌다. 살도 뺐고, 피부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스타일이 세련됐다. 하긴 A가 예전부터 옷은 잘 입었다. 늘 브랜드 옷만 입고 다녔는데, 물어보면 다 엄마가 사준 거라고 했다. 그런 옷만 입고 다닌 거 보면 의외로 A가 ‘금수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퍼즐이 맞춰진다. 혹시 낙하산? 당신은 온몸의 전율을 느낀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유치한 인간인지 29년 동안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순간 ‘번쩍’ 하는 것이 있다. 어쩌면 A는 정규직이 아닐 수 있다는 추론이다. 회사 얘기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A. 그 모습을 보며 당신은 안주와 질문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린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래서, 너 정규직이야?”


  대화의 흐름을 절단시키는 전기톱 같은 질문이란 걸 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계속 타이밍을 살피며 질문을 씹고 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다들 술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다. 당신은 아직 입 안에서 질문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하필이면 이 분위기에서 A가 먼저 일어선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한단다. 당신은 서둘러 그의 팔목을 잡는다.


  “야! 오랜만에 봤는데, 섭섭하다! 한잔만 더 하자. 응?”


  그러자 A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우리, 회사도 가까운데 다음에 퇴근하고 한잔하자. 나 진짜 가야 해. 계약이 끝나가는 시기라 잘 보여야 하거든.”

  “계약?” 

  “나 계약직이야. 이번에 잘되면 무기 계약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순간 온몸에 열이 올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안다. 이 열기는 취해서가 아니다. 미쳐서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친구들은 당신의 유치한 질투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A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를 때마다 불끈불끈 온몸에 닭살이 돋아 이불 킥을 멈출 수 없다. 이 민망함이 오랜 시간 남을 것만 같다. 그래서 당신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왈>


  지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재구성해봤다.

  그는 다시 떠올려도 민망했는지 말하면서도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아마도 자신을 향해 날린 킥이었으리라. 그는 자학 시트콤처럼 친구 A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다.


  “그 친구는 무기 계약직이 됐어.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걔 연봉을 알게 됐는데 나보다 많이 받더라? 난 그 액수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 술을 마셨지. 내가 그때 확신했어. 나 진짜 미친놈이란 걸. 아무튼 나도 얼른 그 회사로 이직해야 하는데, 정규직으로….”


  때론 남자들의 질투심이 더 무섭다.        


        



  비정규직은 마땅히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나, 이것이 두려워 업무와는 상관없는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일이나, 이렇게 정규직이 되어도 ‘내 삶’의 중심을 ‘조직 생활’에 맞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나, 모든 게 두려워 ‘청춘의 시간’을 ‘공무원 시험’과 맞바꾸게 되는 현상까지. 모두 저마다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아니, 살아내려고 노력한다.


  사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사회와 회사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 고립된 ‘을’일 뿐이다. 누군가는 가진 것이 ‘인적자원’ 밖에 없는 나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더불어 차별과 경쟁으로 인한 공포가 인적자원을 발전시킨다고 믿는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일하는 이들의 행복은 점점 사라지고. 뛰어난 인력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고. 많은 사람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게 됐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직원의 희생을 담보로 살아남으려는 기업과, 직원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살아남으려는 기업 중, 어떤 기업이 더욱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제 단순히 '경제논리'만 놓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란 생각이 든다. 애초에 사람 없이는 나라도 기업도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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