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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Sep 14. 2018

가족 같은 회사


  2015년 12월 31일. 

  특별한 날인 만큼 남편과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갔다. 테이블 위에는 VIP 고객을 위한 ‘웰컴 디저트’가 놓여 있다. 죽기 전에 맛봐야 한다는 치즈 타르트와 한국 최초의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프랑스 와인이다. 11시 55분쯤 남편과 나는 와인 잔을 들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하늘 위로 터지는 화려한 폭죽들이 유리를 통과해 눈동자에 비췄다. 5! 4! 3! 2! 1! 2016년 1월 1일은 그렇게 왔다.


  “Happy new year!”


  우린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건배를 한다, 라면 좋겠지만 언감생심!

  현실은 스위트룸이 아닌 20년 산 복도식 아파트의 우리 집 거실이다. 31일까지 야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거실에 앉아 마트에서 떨이로 사 온 피자와 맥주를 마시며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다가 싸웠다. 결국 방에 들어가서도 서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2016년 1월 1일은 그렇게 왔다. 이런 Unhappy new year 같으니라고! 너무 화가 나서 나만 큼 최악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이 또 있을까? 했는데, 있더라. 있어.     




  2016년 1월 1일, 오전 9시. 

  드르륵드르륵. 베개 밑에 넣어둔 휴대폰이 미친 듯이 부들거렸다. 인간관계가 좁아서 새해 인사를 쏟아지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까? 윙크하듯 실눈을 뜨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계속된 진동의 근원지는 동문들이 모여 있는 단체 카톡방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한 장의 사진이 보였다. 산 정상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그 아래에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2015년 12월 31일부터
    2016년 1월 1일 지금까지

    회사 워크숍 중입니다.
    최악이네요.”     


  동문의 사진과 메시지 밑으로 사람들의 비난이 폭주했다. 대부분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는 식의 말들이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회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한다? 직원들이 동의를 구한 행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갈수록 거친 비난과 악플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 회사 노동청에 신고해줄게.”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사진을 올린 동문은 격한 반응들에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는지 “그래도 이번에 파격적인 보너스를 받았어요….”라며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노동청에 신고하겠다던 동문은 “그럼 뭐, 버텨야지.” 하는 식으로 김이 빠진 듯했고, 다들 관심이 사라졌는지 대답이 없었다.

  다시 사진을 봤다. 100명쯤 되는 직원들의 표정은 환한 건지 화난 건지 알 수 없이 묘했다. 그리고 그들 위로 펼쳐진 현수막에는 ‘TT사 패밀리 신년 등반행사’라는 문구가 보였다. 패밀리? 가족? 리얼? 회사와?     




  회사는 직원의 여가를 빼앗을 때 주로 ‘가족’이란 말을 앞세운다. 그 형태는 주말에 열리는 워크숍, 체육대회, 산행, 봉사활동 등 셀 수도 없다. 매번 이런 행사를 통보받을 때마다 침울해진다. 부모님도 간섭하지 않는 나의 주말을 회사는 왜 맨날 가족이란 이름으로 침범할까? 진짜 가족이면 짜증이라도 부리지.

  한국의 직장인은 책상에 참 오래도 앉아 있다. 언론에 주구장창 나오는 ‘OECD 국가 통계’를 보지 않아도 된다. 겨울에는 어두울 때 출근해서 어두울 때 퇴근하느라 해를 품은 낮을 못 보는 직장인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서 요즘 직장인은 자외선을 받아야 생기는 비타민D가 부족하단다. 아, 한국이 비타민D 부족 국가 1위라던데 그건 알고 계신지. 주워 들었는데 그렇단다.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직장 동료와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근무시간이 길어질수록 회사와는 더 멀어진다. 그런데 회사는 자꾸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끝없는 이해심을 강요한다. 수당은 없지만 가족처럼 바라는 것 없이 야근해라, 월급이 좀 밀릴 수 있지만 우리 사이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 주말이라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지만 회사 행사가 우선이다,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채용공고에 이런 문구를 쓰는 회사를 조심해야 한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

  ‘가족처럼 일하실 분’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가족처럼 일해주면 뭐하나? 회사가 힘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텐데. 믿음이 크면 배신감도 큰 법이니까.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것. 상사의 업무가 남아 있더라도 먼저 일을 끝낸 부하직원이 일어설 수 있는 것. 퇴근하면 각자가 원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것. 회사의 충성도가 아닌 개인의 성과를 정확히 평가받는 것. 종이에 써진 대로 그냥 그대로 관계가 이뤄진다면, 직원은 진짜 희생정신을 발휘해 자신의 업무에 열정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멀리 봤을 때 이것이 회사에 더 이득이지 않을까.    




  그리고 왈>

  혹시라도 이 책의 독자 중에 인사팀이나 홍보팀에서 직원에게 보내는 단체 메시지를 작성하는 분이 있다면 부탁하고 싶다.

  제발 ‘임직원 가족 여러분’이란 말은 쓰지 말자. 그냥 ‘임직원 여러분’ 또는 ‘임직원분’이라고 쓰자. 나도 상사나 임원이 지시하면 저렇게 쓰긴 하는데, 절대 내가 먼저 쓰진 않는다. 우리가 먼저 쓰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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