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사소한 일'로 시작된다

여보, 우리 오늘 좀 싸울까?-3

by 이하루


2015년 12월 31일 PM 23:48

새해를 코앞에 두고 '부부싸움'을 시작했다.

누가 새해를 '부부싸움'으로 시작하고 싶을까?

우리도 작정했던 일은 아니었단 뜻이다.




시작은 이랬다.

남편은 연말에도 쉬는 날 없이 바빴고,

난 회사에서 황금 휴가를 줘서 집에서 종일 책을 읽고 쉬고 있었다.

평소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퇴근하던 남편은

이 날은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며 저녁 7시까지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모두에게 특별한 날은 외출을 자제하는 우린

오랜만에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그래서 평소 블로그로만 보던 요리 레시피를 실습할 겸 도전!

나름 뿌듯한 상차림을 준비했다.


2시간 동안 준비했던 식사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싸움의 에너지가 될 식량이란 사실을.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 나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영화도 한 편 봤다.

매드 맥스란 영화였는데

새해를 기다리면서 감상하기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 순간도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는

미친 속도감이 있는 영화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영화는 23시 10분쯤 영화가 끝이 나고

문제의 사건이 시작됐다.

남편은 1월 1일도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12시가 지나면 바로 잠을 자야 한다며

씻고 취침할 준비를 하자는 것.

그리고 말했다.


"얼른 너부터 욕실에 들어가 씻어"




맞벌이 부부에게 '퇴근 후 집'은

게으름과 나태함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장소다.

조금이라도 더 멍하니 소파에 몸을 기대고 싶다.

특히나 요즘처럼 추운 겨울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 씻는가'

장난 같은 언쟁을 해왔다.

둘 다 추운 욕실로 먼저 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 난방비 아끼고 있는 신혼부부는 아시죠? 요즘 화장실 가기도 무서워요. 추워서...


싸움은 늘 사소한 일들로 시작된다.

남편은 내게 먼저 씻으라고 말했고,

다음날 쉬어도 되는 나는 거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위, 바위, 보.

결과는 나의 패배였다.

하지만 난 욕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5분만 더, 10분만 더'하면서

욕실로 가기를 미루었고,

슬슬 남편은 짜증을 내며 볼멘소리를 던졌다.


"넌 꼭 그렇게 약속을 잘 안 지키더라..."


가위, 바위, 보에서 졌으면

약속을 지키라는 말인데

상당히 거슬리게 들렸다.

그리고 순간 지난 2주간 내가 먼저 들어가서 씻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꼭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하더라!
욕실이 추우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서 따뜻하게 하라는 거야?
남자가 참..."


분명 15분 전까지는 장난스러웠던 우리였지만,

저 말이 오고 간 후부터는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내가 약속 안 지키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근데 또 이러냐?"


"내일 출근 때문에 일찍 자야 할 것 같으면

먼저 씻고 자! 굳이 내일 쉬는 나를 먼저

욕실로 들어가라는 이유가 뭐야?"


"아휴~ 네가 그러니까. 친구들이랑도 그렇지!"



저렇게 몸싸움은 하지 않지만, 우리 부부는 꼭 서서 싸워요. 프레젠테이션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 부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편의 마지막 말은 공격, 그 자체였다.

결혼 후 친구들과의 사이가 사뭇 달라진 것이

고민이었고, 남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쓰고 싶은 주제인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랬다.

친한 친구들은 5명인데

4명은 주부이고 나만 맞벌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도 서로 상황이 달라지면

할 이야기가 줄어들고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도 사라진다. 이 경우는 나만 그랬다.

이럴 때는 나만 좀 참고 노력하면 될 것인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변명하지만

나도 고민이 있고 스트레스가 있지만,

예전처럼 함께 조잘거릴 수가 없다.

게다가 직장생활과 집안일을 모두 챙기다 보니

정신줄 잠깐 놓으면 하루가 초바늘처럼 지났다.

점점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빠지고

대화도 줄여나갔다.

만남과 대화가 줄어들면 오해가 쌓이기 마련.

친구들과 그렇게 됐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남편의 저 말은 친구들과의 서먹해진 관계가

오르지 나만의 잘못이라는 것 같았다.

싸움이 시작되면 비난할 수 있는 모든 주제를 모아서
최대한 큰 고통을 줄 방법으로 상대를 겨냥하다.
정치판이나 집 안이나 모든 싸움의 형식은 참 비슷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건 너의 잘못이라고,
넌 참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날 우린 새벽 2시까지 계속 말싸움을 했다.

짜증 내다가, 소리 지르다가, 타이르다가, 조용해지다가, 다시 대화를 시도하다가,

타협하다가, 앙금은 안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남편이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싶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응원하고,

함께 행복한 저녁 식사까지 했는데 말이다.

남편이 씻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먼저 자라는 말을 하고 욕실로 쌩하니 들어갔다.

다 씻고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남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 꺼진 방에서 둘 다 시커먼 천장만 바라봤다.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남편과 닮았네요. 얼굴 길이가... 아마, 그날 밤 둘 다 저런 표정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을 것 같아요.

"미안해. 생각해 보니까. 내가 지나쳤네"


"그러게 나도 생각해보니까.

과민하게 반응했어"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진짜 별거 아닌 일에서 싸움이 시작된다.

부부싸움도 그렇다.

물론 별 거 아닌 일들을 통해

함께 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단점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아마 대부분 나와 비슷할 것 같다.


연애 때는 싸우면 집으로 가 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싸워도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

간혹 집을 나가 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남편과 나 역시도 1번씩 집을 나가본 후에는

싸워도 꼭 집에 붙어있는다.

집 나가면 고생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내심 싸움과 냉전의 기간을 줄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둘 다 생각은 달라도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만들고 싶은

공통점은 있는 셈이다.

이런 결심과 마음가짐에도 사소하고 별 거 아닌 일들로 부부는 싸운다.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작되어 이혼하는 부부도 적지 않다.


"우리 앞으로 싸우지 말자"


라는 말을 초반에는 서로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을 더 많이 한다.


"서로 잘 풀고 화해하는 방법을 찾자"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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