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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Dec 31. 2017

새해 첫날, 우리의 근사한 계획

여보, 우리 오늘 좀 싸울까?-16

 
  눈을 떴을 땐 이미 오전 11시가 훌쩍 지난 후였다. 지난밤 새벽 2시까지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9시간이면 충분한데, 눈꺼풀과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순간. 전날 남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내일 크리스마스니까. 오전에 집 근처 카페거리에 가서 브런치나 먹자.”    


  번쩍! 눈을 뜨고 옆에 있는 남편의 동태를 살폈다. 드렁, 드렁, 드렁. 일정하고 빠른 리듬감으로 코를 고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남편을 깨웠다가는 꾸깃꾸깃 옷을 챙겨 입고 카페거리로 가야 할 터였다. 만약 가지 않으면 난 또 변덕쟁이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인기가 있는 맛집을 늦은 시간에 간다는 건. 줄을 서서라도 그 음식을 먹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날이 사납게 추워서 인지. 칼바람을 견디며 줄을 서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계획이 파투 날 수 있도록 숨죽여야 했다. 드렁, 드렁, 드르렁하면서….     




  “어차피 늦었는데,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나 해치워 볼까?”    


  오후 1시가 넘어 일어난 우리 부부는 집밥을 먹었다. 식탁은 시댁에서 챙겨 온 미역국, 전, 나물, 김장김치. 그리고 친정에서 가져온 멸치, 젓갈, 김장김치로 풍성했다. 긴 공복 끝에 먹은 집밥은 맛집 못지않게 꿀맛이었다.

  다른 주말과 매우 똑같은 풍경이었다. 트리가 없었다면 잊을 뻔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란 사실을…. 우리의 4번째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지나갔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에게 ‘쿨하네’ 또는 ‘로맨스가 없네’라고 말한다. 모르는 소리. 우리도 연애 때는 그럴싸한 것들을 계획하려고 애썼다. 좋은 숙소를 알아보고, 후기가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서로를 위한 선물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특별한 날의 개념이 바뀌었다. 12월 내내 달콤한 마케팅으로 공격을 당해도, 연말은 특별한 날이 아닌 비싼 날이다. 게다가 둘 다 체력이 바닥이라, 사람 많고 추운 곳에 가면 금방 지쳐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적고 합리적인 가격에 누릴 수 있는 날이 아니면,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우리까지 동참하진 않는다. 물론 SNS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사진 속 풍경은 부럽다. 근데, 그냥 부럽울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기분이 들뜨는 연말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럴듯한 계획 대신 근사한 계획을 세우니까. 아니, 쓰니까.     




  늘 내일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모두 다르겠지만, 남편과 나는 이것을 위해 두 가지를 고민한다. 매년 1월 1일. 우리는 소중한 사람과 더 괜찮은 날들을 보내기 위해, 그리고 내가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쓰고 붙인다.     


  첫 번째 계획은 서로가 지켜줬으면 하는 것들에 대해 정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세 가지.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싸울 때면 서로에게 서운했던 것들이 터진다. 싸움의 원인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것들은 마음속에 조용히 쌓인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만이다.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그런 오해와 불만….

    

  2017년 1월 1일 00시. 남편과 나는 식탁에 와인, 케이크, 종이, 펜을 올려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지난해 서로에게 서운했던 것이 무엇인지. 바랬던 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털어놨다. 이때 우리 부부가 조심하는 건 말투와 볼륨이다. 자칫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날카로워지면 다시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 그날 남편은 내게 차근차근한 말투로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난 가끔 네가 짜증 나거나 화난다고 격한 말을 할 때, 좀 상처받았어. 그리고 돈 얘기만 나오면 예민해지는 것도 답답할 때가 있고…. 나는 지금도 행복한데, 너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싸울 때 여러 번 들었던 말이지만, 그의 심정이 나의 마음에 제대로 내려앉은 건 처음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바쁘고, 피곤하고,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예민했던 적이 많았다. 또한,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 적도 있다. 정말 내가 남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고쳐야 할 점들이었다.     


  “난 오빠가 불필요할 정도로 ‘왜?’라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빠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울적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해야 할 일이 하기 싫을 수도 있거든. 근데 그럴 때마다 이유를 끝없이 물어보는 게 힘들어. 좀 쉬고 싶거든.”    


  나도 싸울 때면 고함치듯 하는 얘기를 차분하게 해 나갔다. 그러자 남편도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줬다.     


냉장고에 붙여둔 이 종이 때문에, 남편에게 화가 나서 혼자 밥먹으러 부엌에 갔다가 남편에게 가서 사과한 적도 꽤있다.


  그리고 두 번째 계획을 위해 각자가 원하는 꿈과 소망이 무엇인지 얘기했다. 1년 전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싶다고 했다.

  우린 두 가지에 대한 계획을 두 장의 종이에 정리한 후, 매일 우리의 대화를 기억할 수 있도록 이것들을 냉장고와 현관에 붙여뒀다.           


현관을 나설 때마다 볼 수 있게 붙여둔 각자의 계획. 잘 지켜지진 않았지만, 성과가 없던 건 아니니까, 하며 위로해 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저 내용들은 잘 지켜졌을까?


  먼저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약속한 내용들은… 예상대로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역시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에 한 번에 바뀌지 않았다. 나는 그 후에도 가끔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그리고 소비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편 또한 사소한 일에 이유를 추궁했다. 함께 도서관에 간 건 5번쯤?이었고, 아직도 흡연 중이다. 요즘 대한민국 남자들의 핫 아이템이 된 P사의 전자담배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변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린 전보다 서로를 위해 노력을 했고,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의 횟수를 줄였다. 그런 탓인지 싸우는 횟수가 지난해보다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두 번째로 각자가 세웠던 목표는 절반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작은 성과는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 대신 브런치에 작성한 글로 상을 받고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 남편도 올해 원하던 대로 승진을 했다. 쓰고 보니 우리 부부는 올 한 해도 열심히 산 것 같다.     


  오늘도 자정이 되면 근사한 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소중한 사람과 행복해질 수 있는 계획, 그리고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는 계획을 얘기하고, 쓰고, 붙일 것이다.


  욕심일 수도 있지만, 2018년은 2017년보다 더욱 행복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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