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가 다 떨어졌는데 주문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은 물을 아껴마셔야 한다. 하지만 물이 없음을 인지한 내가 바로 취한 행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스크림 라테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 부족에 대한 공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냉동고에 10구의 얼음이 한 판 그득히 얼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니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음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언제 일 인지 모를 과거의 나는, 오늘 만큼은 어쩐지 칭찬받아 마땅하다.
커피가 내려지는 순간은 내게 유일한 쉼을 주는 시간이다. 때론 너무 찰나와도 같아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얕은 물줄기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더 소중하다고 느낀다. 어찌 보면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내리고 싶어서, 멍을 때리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주 오랜만에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몇 개월 동안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받아내다 보니 역시 또 몸이 고장 났다. 황미나 선생님의 <레드문>에서 미워할 수 없는 악역 아즐라는 정신적 고통이 생길 때마다 그렇게 구토를 해댔다. 그땐 단순히 아즐라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캐릭터를 증폭시키기 위한 내러티브적 장치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비슷한 패턴의 정신적 고통이 발생할 때마다 식어버린 손발을 부여잡고 자동문처럼 열리는 식도와의 싸움을 수차례 반복하며 그렇게 나는 종종 아즐라가 되었다. 그의 속도 모르고 그저 주인공 윤태영을 괴롭히는 그의 모습을 1차원적으로 해석하며 악당의 권선징악적 비참한 말로를 목격하기 위해서 다음화를 기다렸던 초딩은 이제야 아즐라의 마음을 깨달았고, 작가님의 디테일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