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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Jan 24. 2021

02. 프라하로부터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찾아지는 것들이 있다.


 

 언제나 길을 잃는다. 한 번도 빠짐없이 길을 잃어왔다. 뉴욕에서는 구글 맵을 볼 줄 몰라서, 베이징에서는 구글 맵을 볼 줄도 모르는데 중국어를 읽을 줄도 몰라서, 프라하에서는 레고로 만든 것처럼 생긴 건축물만 보고 발 길을 옮기다가. 결국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도착해 헤매다 한 눈에는 담기지도 않는 성당을 바라보고는 턱이 빠져라 감탄을 하고 슬러시 한 잔을 사 먹으며,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방향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계속 이렇게 길을 잃고 한참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아니 결국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 길 위에서 행복일 것이라는 사실을.




 유럽 호텔이 누가 별로라 했던가. 작은 호텔이었음에도 침구가 좋았던 건지 개운하게 눈을 떴다. 심지어 새벽 5시 반에.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아주 환한 프라하에 첫 발을 내디뎠다.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아침 냄새가 풍겼고 - 보통 나는 이것이 해의 향이라 여긴다. - 길거리에는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전혀 현대적이지 않은 건물 사이에 제 각각 갈 곳을 향하고 있는 사륜구동차들이 왜 유독 신기했을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을 텐데.


 프라하는 소담하고 아기자기한 곳. 자동차보다는 사부작사부작 발 길이 더 어울리는 곳.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있던 편견을 마주했던 순간. 그래서 흥미로웠던 하루.


 아, 한 가지 더 하자면 저런 편견 때문에 프라하의 모든 것은 조금 느리게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신호등 바뀌는 시간이 너무 빨라서 매번 총총총 뛰어다녔던 걸 보면. - 물론, 현지인들은 무리 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 덧붙이자면 나는 키가 큰 여성이다. 다시 말해, 다리가 길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로 불편함을 겪을 일이 없었지만 어쨌든 유럽인들은 키가 훨씬 더 컸음을. 여행은 정말이지, 평생 하지 못할 이런 경험들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으하하하.



 여행 당시, 체코 프라하는 어떤 특별 주간이었는지 다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면 전봇대 밑에 초와 꽃, 인형들이 놓여있었다. 체코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그저 어떤 사건을 혹은 어떤 존재를 기념하기 위함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그리고 프라하 길 위에 두 발을 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심을 다해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꼭 온전하기를 바랐다.


 

 숙소에서 유명 관광지가 모여 있는 스팟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구글 맵에서는 트램을 타고 이동하라고 했지만 도보 이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너무도 옳은 선택이었다. 울퉁불퉁 올라와 있는 돌 때문에 다리가 아플 거라는 말과는 다르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는 반질반질한 돌 마저 눈에 들어왔으니.


 두 시간 동안 뭐 하나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유명 관광지는 모두 돌아봤던 것 같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앗아간 기억 덕분에 이름이 명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무슨 대학, 어떤 시계탑, 모차르트 동상. 그리고 그중에 조금 더 기억에 남는 건 하벨 시장의 복숭아, 어딘가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고작 기억에 남는 게 그런 거냐고 묻는다면 원래 인생은 먹는 즐거움이 가장 큰 게 아니냐고, 당당하게 반문하리라.


사실 소름끼치게 맛있었던 건 아니지만 뜨거운 햇볕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당 충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찾아지는 것들이 있다.



알록달록 자그마한 꽃송이와 창문 난간에서 눈을 사로잡던 행잉 화분


 까를교에 도착해서야 진정한 자유 여행이 시작되었다. 인천공항에서 엉겁결에 신청했던 투어는 포기하고 까를교 밑의 거리를 찾았다. 보통은 까를교 위에서 혹은 그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떠난다 했지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가 그랬다, 행선지를 잊고 까를교 밑으로 떨어졌더니 훨씬 괜찮은 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똑같은 이유로 나는 그 말에 적극 공감하게 되었다. 적막이 좋았고 적당한 고요가 반가웠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눈으로 가고 싶은 레스토랑을 찾았다. 저기 건너 저 편의 곳이면 충분하겠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오후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진정 트램의 향연이었다. 유럽 여행의 환상이라는 트램, 그것은 기꺼이 불특정 다수의 로망이 될 만했다. 트램에 올라타서 신용카드로 티켓을 구매하는데 어찌나 초조하던지.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서처럼 카드가 읽히지 않으면 나는 이제 잡혀가는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범법자로 몰릴 수는 없는데, 동양인 여성이라 더 불리하려나. 별에 별 생각을 하며 그러나 최대한 초연한 표정으로 트램에 올라 노란색 티켓 머신 앞에 섰다. 신용카드를 끼워 넣으며 제발,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여행 신!


여행 신에게 응답 받은 간절함



 오후 여행의 목적은 성 비투스 성당에 가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길을 잃었다. 언제나 길을 잃는 여행객. 놀랍지도 않았다. 구글맵을 제대로 보고 있는 줄만 알았다. 가고자 하는 곳은 유명한 관광지였고 트램에서 내린 사람들은 다 한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지. 심지어 정문 앞에서 테러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소지품 검사도 받았는데! 여기가 거기가 아니라니! - 지금 생각해보면 프라하 성이 프라하 성인지도 모른 채. 들어가 놓고 그 안에서 헤맨 건 아닐까 싶다. - 그래도 결국 성당을 찾긴 했는데 그땐 이미 햇빛에 모든 기력을 빼앗겨, 겁도 나지 않는 웅장함에 압도당해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고 필사적으로 찾아낸 그늘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작 목적지로 삼았던 곳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깡 생수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된통 길을 잃어봤겠다, 더 이상 길을 잃지는 않겠지 안도하며 한낮의 노골적인 햇빛을 기꺼이 맞아냈다. 뉴욕에서는 쉬지도 않고 연신 길을 잃어놓고 왜 그런 방만함을 품었는지. 또다시 기다렸다는 듯 알지도 못하는 프라하 성 어딘가로 흘러들어 가는 날 떠올려 보면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한참을 걷던 중 감당할 수 없는 온도의 한 여름에 이유 없이 서늘해진 등짝이 나에게 속삭였다는 것. '야, 너 또 길 잃었어.'



길을 잃어 덕분에 마주한 장면


 그때부터는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였다. 제대로 볼 줄도 모르면서 멍하니 켜 둔 구글 맵은 종료했고 줄곧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도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정말 촉으로만 여길 빠져나가 보자, 설령 그 스타벅스를 찾지 못해도 뭐가 그리 큰 일이라고. 물론, 그곳에서 쉬지 못하면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알지 않던가.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프라하에 온 뒤로 가장 지쳤지만 가장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어차피 어딜 가도 낯설고 이색적인 곳들 뿐인데 목적지가 무슨 소용인가. 항상 바쁘게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많이 해봤으니까, 이제는 그저 가야지, 무언가가 나를 이끈다면 부디 이유가 있으리라.


40분 쯤을 걷고서 발견한 스타벅스 로고. 허탈감에 으하하하 웃어버렸다.


프라하 성 스타벅스에서 내려다 본 낯설지만 아기자기한 그 곳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걸었는데 한국에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을까. 스타벅스를 찾고 커피 한 잔을 하고 나왔을 때 노을이 지려던 참이었으니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해가 지는 초조함에 발이 묶였을까. 혹시라도 프라하 성 깊숙이 갇혔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든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위에 나열한 경험을 직접 해 보지는 않아서 무거운 확신을 실어 써 내려가기엔 조심스럽지만 나는 분명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길이 찾아졌을 것이다. 논리적 근거는 없지만 축적되어 온 여행의 경험을 들여다보면 영영 길을 잃는 게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아가며 계속 길을 잃는다. 너무도 당연하게 처음 내딛는 걸음이니까, 그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처음일 테니까. 그래서 자꾸 헤매고 발이 빠지고 뒤를 돌아보게 되겠지만 결국은 틀리지 않은 곳에 도달할 것이다. 나의 20대가 그러했고, 쉽지 않은 길을 돌아왔어도 나의 30대가 안정적이고 편안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편안함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온 몸에 지고 있는 짐은 조금 내려놓고 땅을 딛는 걸음에 집중하며 걸어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느꼈을 때에는 그늘을 찾아 잠깐 주저앉아도 그리 늦지 않는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꼭 잊지 않으셨으면.


프라하가 나에게 남긴 진한 속삭임,


어디선가 함께 걸어오고 있을 동료와 부디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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