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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Feb 11. 2021

05. 부다페스트로부터

이제 와 고백하자면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생소한 경험은 지난 새벽에 모두 끝났다고 여겼다. 이제는 2일 차이니 어지간한 풍경도, 열기도 모두 익숙해졌으리라 내심 시건방을 떨었다. 마음처럼 익숙한 광경만 마주할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맛있는 조식을 배불리 먹고 그레이트 홀 마켓 앞에 서 굳게 닫힌 문을 보았을 때이었다. 하, 오늘 하루도 계획처럼 흘러가지는 않네. 아무런 계획이 없는데 이제 어디를 가야 하나.



 한국에서는 하지도 않던 인스타그램으로 다음 목적지를 찾았다. 프라하에서 투어를 안내하던 분은 프라하에서 모든 쇼핑을 끝내고 가라고 했다. 특히 헝가리는 다른 동유럽에 비해 물가가 비싼 편이니 부다페스트에서는 가급적 쇼핑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역시 나는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내 마음대로 인간형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넘어가기 전에 꼭 흰색 셔츠 하나를 구매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는 옷매무새가 중요한 나라라고 했으니 너희 나라 문화를 기꺼이 존중한다는 마음으로 옷을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부다페스트에서부터 오스트리아 빈 여행을 이토록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는 점이 조금 웃기지만 그 최선을 위해 2번 트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달리지 않아 생각했다. 대체 누가 부다페스트는 야경이라고 했는가! 부다페스트의 선명한 낮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 사람이라면 결코 밤만 운운할 수 없을 텐데.


트램이 지나가는 길
저 세상 태양의 위엄

 

 목적지 앞에 멈춰 선 트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부다페스트의 아주 뜨겁고 또렷한 낮 덕분에 차곡차곡 몸 안에 쌓여버린 열기가 훅 하고 올라왔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열기에 야경이 유명해진 건 낮이 너무 뜨거워서가 아닐까 싶었지만 미친 듯한 뜨거움에도 모두가 부다페스트의 낮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작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같은 곳이 전혀 다르게 보일 테니 부다페스트의 낮에 소홀하지 마시기를 바라본다.


 

 간신히 참아낼 만한 열기를 등에 엎은 채 한 손에는 흰색 셔츠,  뱃속에는 코스타 커피와 크루아상을 두둑이 담고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저녁 식사를 위해 까마귀 식당을 찾았다. 여행객에게 유명한 곳이었는데 개인적 취향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음식도 그다지, 서비스도 그다지, 그냥 다 그다지. 그래도 고기를 먹었고 맥주를 마셨으니 - 동유럽에서는 내내 취해있었던 것 같은 느낌 - 겔레르트 언덕을 향해 갔다.   

 

 말은 언덕이었는데 까마득한 계단이 펼쳐진 것을 보고 고행이 이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른 경로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뚝심 있게 무한 계단의 고통을 정복하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심히 걱정스러운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빨리 눈에 보이는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엉덩이를 붙였다. 일단은 쉬어야 했다. 세체니 다리 어디쯤에 올라앉아 술을 마시던 부다페스트 젊은이들처럼 놀 순 없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이 곳에서 본전을 뽑아야지 그런 촌스러운 마음으로 소프로니 캔맥주를 깠다. 지난 새벽의 맛에는 못 미쳤지만 결국 부다페스트의 열기에 져버린 나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그 한 캔을 손에 쥐고 깔깔 맨이 되어 기쁘지도 웃기지도 않은 일에 쉬운 웃음을 지었다. 웃고 싶었던 이유는 대화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그 순간 정착해 낯선 도시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니까. 정말 하염없이 몇 시간을 웃었는지 모른다.


 

 뜨거운 열기로 한 순간도 잊지 못하게 했던 태양의 존재가 점점 사그라들고 완연한 밤이 되었을 때,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무한 계단의 지옥불을 맛 본 우리는 완만한 반대 경로를 선택했다. - 이 경로는 우연히 겔레르트 언덕에서 만난 나의 친구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낯선 여행지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익숙한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감정도 적어보고 싶다 - 계단 하나 없는 길을 내려오는 길에 대체 몇 시간 전 얼마나 어리석은 걸음을 뗀 것인가에 대한 후회가 스칠 때쯤 숙소로 돌아갈 버스를 탈 티켓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우리 모두에게.

 

 동유럽 여행을 오면서 다짐한 것은 절대 무임승차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 하거니와 굳이 해외에 와서 준법정신을 잊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의 무임승차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티켓을 사고 싶었지만 파는 곳은 없었고 버스 안에 티켓 구매 머신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만 하필이면 탑승한 버스에 그런 머신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진짜 간절했다. 걸리지 않게 해 주세요! 이번만 넘어가 주시면 제가 좋은 일 많이 할게요! 걸리면 영어도 잘 못해서 그럴싸한 변명도 못 한다고요! 두근 반 세근 반 무슨 큰돈이 되는 보석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리만 덩그러니 있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는 나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버스는 아무 일 없이 숙소 앞 정류장에 우리를 놓아주었다.


  나는 길가에 서서 다시 한번 깔깔깔 웃어제꼈다.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해보는 무임승차가 이런 식이라 어이가 없었고 몇 분 전만 해도 걱정이 그득했던 내가 한순간 홀가분 해지는 순간이 너무 얄팍해서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저 갈 길을 가는 버스 뒷모습을 향해 고마워!라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배를 잡고 웃으면서 생각했다. 더 선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그리고 더 여행을 다녀야지, 자꾸 여행을 다녀야지. 그래야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상황들을 마주하며 말랑말랑 인간으로 살아가지. 그래야 한 세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분방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 무임승차가 자유분방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임승차 에피소드로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부터 굳이 끌고 온 오만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져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  


겔레르트 언덕을 향하던 트램, 세체니 다리 위 사람들.

 


 부다페스트로부터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은 밤도 낮도 아닌 자유분방함.  


 세체니 다리 어딘가에 올라앉아 다뉴브 강을 바라보며 밤을 즐기던 사람들,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물이 있는 광장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여름을 이겨내는 사람들,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몇 시간이고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

 

부다페스트의 밤도 낮도 모두 잊어도 됩니다, 그들의 자유분방함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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