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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Feb 14. 2021

06. 비엔나로부터

사실은 '빈'으로 부르고 싶었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초반의 한 문장이 이토록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다. 빈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온전히 담아낼 수 있나, 너무도 고민스럽다가 문득 '아, 사랑이다.' 또 한 번 확인한다. 대상을 마음에 담는 행위마저 닳아버릴까 아까워 조심스러워지는 것.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빈을 사랑한다.


물기 젖은 빈


 빈에 도착했을 때, 끝 물의 비가 한 두 방울 미련을 떨구고 있었고 그에 어울리는 다소 쌀쌀한 공기가 온통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넘어온지라 갑작스러운 한기에 꽤 당황스러웠지만 캐리어 속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던 카키색 롱 재킷을 떠올리며 변태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날씨를 예견하기 쉽지 않은 유럽에서 이 정도면 선방이 확실했으므로.


 

 설렘을 안고 들어간 숙소에는 꼬깃꼬깃한 웰컴 카드 위에 로투스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미 이 곳을 담뿍 사랑할 준비가 된 나에게 마음껏 충분히 사랑에 빠져보라는 무언의 허락 같았다. 물론 그런 허락이 없어도 못내 기꺼이 사랑했을 테지만 나는 조금 더 사랑의 고삐를 풀기로 했다. 빗물에 젖어 조금은 흐리고 탁한 회색빛을 띄우는 첫날의 빈을 사랑해 마지않았으니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할 빈은 없겠구나 싶었다. 빈에 제대로 코가 꿰인 나, 그리고 더 꿰일 코가 남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


웰컴 까까 로투스

 

 회심의 미소를 선사했던 카키색 재킷을 걸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았다. 첫 응대는 백인 웨이터가, 주문을 받을 땐 어쩐지 조금 더 상급자 셰프로 보이는 동양인이 테이블로 와주었다. 관광지에서 의미 없이 스치는 관광객을 제외하고 여행 중에 처음 마주하는 동양인이어서인지 굳이 주문을 받으러 나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짧은 영어로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먹고자 하는 메뉴를 말하고 '당케!'를 외쳤다.


치즈 그득한 이탈리안 뇨끼 & 피자


 보기만 해도 찐득찐득 치즈가 그득했던 음식은 포크를 올리기도 전부터 눈과 코로 유럽 치즈의 강렬한 존재감을 전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몇몇은 음식이 짜다는 의견을 내비쳤지만 나는 음식이 짜야 맥주도 벌컥벌컥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으로 두 번째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역인 줄만 알았던 Keplerplatz


 흡족했던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맑게 개인 하늘이 높아져 있었다. 본격적인 빈 여행의 시작이었다. 귀찮지만 여행의 고단함을 줄이기 위해 다시 숙소로 돌아가 우산을 내려놓고 각자의 여행을 위해 일행들과 잠시 헤어져 지하철역을 찾았다. 일행들과 헤어지지 않고 계속 같이 다녔더라면, 숙소 코 앞에 있던 역이 단순한 기차역이 아니라 지하철역까지 다니는 중앙역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빈에 있는 3일 내내 나는 3분도 안 걸릴 중앙 역을 앞에 두고 굳이 10분쯤은 걸어가야 나오는 뒷 동네 지하철역을 이용했다. 구글 맵의 말을 잘 들어도 문제, 안 들어도 문제. 빈에서는 길을 잃지 않았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와 보면 중앙 역을 중앙역인지 모른 채 보낸 72시간이 그 경험을 대신한 게 아닌가 싶다.


차마 다 담기지 않던 성 슈테판 대성당


 가장 처음 찾은 곳은 성 슈테판 성당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어마어마한 성당이었는데 그만큼 인파도 많았고 성당 주변을 하염없이 배회하다 마주친 한국인 관광객들도 꽤 많았다. 프라하 성에 있던 스타벅스를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이어서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면을 향해 코너를 돌았을 땐 관광객을 타깃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었는데 기대하지도 않던 '안녕하세요.'가 여기저기서 들려서 두 번째 반가움이 피어났다. 반가움이 참 쉽다. 그러나 그때 나는 빈을 사랑해 마지않는 여행객이었으니 좋지 않을 이유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저의 기도를 잊지마세요


 그렇지만 호객행위에 당해 줄 마음은 없었기에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가 기도가 담길 초를 샀고 그 어떤 때 보다 조심스럽게 이미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 초의 불을 빌렸다. 그리고는 그 누구보다 뒤처지지 않을 절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무교인 주제에. 제발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수년을 살아왔음에도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해 주세요. 진짜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제는 좀 평온히 행복할 수 있게 여지를 주세요. God the Father, God the Son, God the Holy Ghost. 누가 보면 성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일 법하게 성호를 긋고 눈을 떴을 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두 모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미소를 지어주고는 성당 내 자리를 잡고 앉아 길지도 짧지도 않은 휴식을 취했다. 아마도 마음의 휴식이었을 것이다. 부디, 평온하게 하소서.


종종 마차가 다니던 궁전 앞


 다음으로 찾은 곳은 호프부르크 궁전인데 내부를 관람하지는 않아서 인지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되레 인상적인 건 궁전을 가로질러서 카페 뮤지엄을 가기 위해 걸었던 평범한 길이었다. 왜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빈은 좀 심심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는지 너무도 알 것 같은 길. '유럽'의 모양새를 띄는 건물들이 줄을 맞춰 곧게 서 있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인도와 차도가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지난 며칠간 밟았던 무지막지하게 우둘투툴 한 바닥이 아닌 적당히 걸을만한 길.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를 더더욱 깊은 사랑으로 떠밀었다. 충분한 공간, 적당한 사람, 모자라지 않은 생기.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지만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빈에서는 흔하디 흔할 그 거리를 떠 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빠르게 뛰고 그곳에 있었던 나에게 시기 어린 질투를 하게 된다. 아주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의 나에게 너무너무 샘이 난다.


빨간색 셔츠를 입고 찾았던 빨강 가득한 카페 뮤지엄


 꽤 먼 거리였지만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카페 뮤지엄은 빈의 무드를 그대로 쏟아 넣은 곳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름만 올려진 현판과 큰길과 조금 떨어져 있는 덕분에 약간은 한가했던 공간이 무엇 하나 빠짐없이 내 취향에 쏙 하고 맞아 들었다. 여행객이 많은 도시이겠지만 바깥에서 본 내부에는 동양인이 없는 것 같아서 약간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보통은 원하는 자리에 알아서 앉으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어색함에 눈을 돌리고 있을 때, 멀찌감치 있는 바에 서 있던 직원과 눈이 마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웃었다. 내 마음대로 앉으면 돼? 입을 떼 진 않았지만 눈으로는 말했겠지, 그러니까 그도 손을 뻗어 안내하고 웃어 보였겠지.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구석지진 않았지만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백발의 할아버지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테이블을 세팅해줬는데 나비넥타이에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에 왜 의복 예절을 지키라고 했는지 너무도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유독 여행객들에게 인종차별과 불친절의 후문이 많은 이 나라는 알고 보면 셔츠와 재킷을 입은 외관이 그럴싸한 사람만 손님 취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줄곧 지켜왔던 문화를 존중하고 조금이나마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만한 보답을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시 간다면 Warmer Topfenstrudel


 특별할 건 없지만 재밌어 보이는 카이저슈마른과 아인슈페너를 주문하기로 하고 메뉴판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어 카페를 천천히 둘러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웨이터는 누구일까, 눈 맞춤을 기다리는 시간은 1초도 남김없이 매 순간이 기대였다. 곧 한 웨이터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또 웃었다. 그가 다가왔고 나는 '할로'로 시작해 '당케'로 끝나는 주문을 마쳤다.


퐁신퐁신 재밌고 맛있던 카이저슈마른


 기대한 것보다 신속하게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은 생각보다 귀엽고 예뻤다. 망쳐버린 핫케이크라더니 어떤 모양도 없이 작게 조각조각난 모습이 퐁신퐁신 각자의 이유로 신이 난 것처럼 보였고 아인슈페너에 그득하게 올라간 크림이 달면 어쩌나 싶은 우려를 단칼에 차단해버린 에스프레소 고유의 쓴 맛이 찌릿하고 혀에 남았다. 특히 맛있었던 건 사진 속의 노란색 잼이었다. 어스름한 기억에 의존하자면 사과 잼이었는데 핫케이크를 먹을 만큼 먹어 배가 부른 와중에도 아인슈페너 한 모금, 잼  반 수저를 번갈아 먹었다면 그 맛에 더 이상 더 할 수사어가 필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더 이상 더 할 수사어가 필요 없는 첫날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발걸음을 실었다.



 오스트리아 빈이라고 들어왔던 것과는 모든 것이 달랐던 오스트리아 빈. 여전히 비엔나라 불러야 할지, 빈이라 불러야 할지 순간순간 어떤 명칭이 더 이 도시에 어울릴까 고민해보지만 '빈'이라는 어감이 역시나 더 어울려. 하지만 그럴싸한 이유를 나열하지 못하는 건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했다간 '구구절절'이라는 표현이 우스울 정도로 사랑의 고백을 끝도 없이 줄줄 읊어낼 것이 분명해서. 그러다 보면 그때의 나에게 또다시 시기 질투를 느낄 만큼 빈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깨닫고 심장이 동동동 난리법석일 것이 분명하니까, 마치 지금처럼.


여전히 정말 사랑해, 오스트리아 빈.

여전히 심장이 동동동하는 나에게서 잊히지 마, 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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