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내가 호감을 가졌던 회사 남자 동료와(그 남자라고 부르겠다) 다른 동료와 나는 길을 걸으며 뭘 먹을지 의논했다.
그 둘은 나에게 양꼬치를 좋아하냐고 했다.
양꼬치? 너무 좋았다.
서로 소리 지르면서 대화를 해야 할 만큼 시끄러운 양꼬치 집에 들어갔다. 다른 동료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우리 보고 먼저 앉으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관심 있었던 그 남자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뻘쭘하게 뭘 시킬지 대화를 나누다가, 그 남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진짜 웃긴 게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몇 달간 내가 관심이 있던 남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당시 나는 너무 궁금하고 두근거렸다.
그 남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완전 귀엽게 생겼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더 많으려나? 하고 생각하며 나도 마스크를 벗었다.
화장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회사에서 나오기 전 미리 메이크업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꼼꼼하게 하고 나왔기 때문에 당당하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수십 번의 소개팅을 통해 마스크에도 무너지지 않는 화장법을 단련해서 그런지 그 남자가 주문하려고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빛의 속도로 본 손거울 속의 메이크업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그 남자는 마스크를 벗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색하게 나에게 물었다.
"tangerine님은 술 좋아하세요?"
나는 0.1초 만에 대답했다.
"네, ㅎ 좋아해요." (플러팅을 하기 위해 좀 귀엽게 대답했다)
그 남자는 내가 곧바로 대답하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때 왜 웃었던 거냐고 지금 물어보니, 물어보자마자 술 좋아한다고 바로 대답한 게 예상치 못해서 웃겼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한다고 대답하고 나니, 고량주와 맥주가 빠르게 상을 채웠다.
몇 달간 호감을 가졌던 그 남자와 드디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술을 마시면서!
그 남자는 나보다 5살이 많았다. 내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 그 남자는 동안이었다. 나는 소개팅을 할 경우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싫어했다. “오빠가 말이야”라는 멘트 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보다 꽤나 아는 게 많은 것처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을 많이 경험해 봐서 나는 동갑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한 이상 그가 나보다 5살 연상인 것쯤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돌아가는 양꼬치들을 바라보면서 그 남자의 연애라이프에 관한 질문을 언제쯤 자연스럽게 시작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다른 남자 동료가 그 남자와 자신 둘 다 연애를 안 하기 때문에 둘이서 술을 자주 마신다고 했다. 나는 “저도 남자 친구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남자 동료는 아무도 묻지 않은 그 남자의 연애 상황에 대해 줄줄 말해줬다.
“이 친구도 연애 안 한 지 오래됐고, 뭐 저희 둘 다 연애 안 한 지 3년은 넘었을 걸요? 넌 몇 년 됐지? 아무튼 그래서 둘이서 술 자주 마셔요. 둘 다 소개팅도 안 한 지 오래됐어요. 너 소개팅도 안 한 지 지금 몇 년이지?”
나는 대화 틈틈이 그 남자에 대한 연애 정보를 줄줄 말하는 다른 남자 동료를 기특하게 쳐다보며 속으로 ‘잘하고 있어! 계속 이야기해 더!‘라고 외치며 신나게 양꼬치를 뜯었다.
다른 남자 동료 덕분에 나는 그 남자의 전 여자 친구가 발레를 했었고 그 발레녀와 그 남자가 꽤 오래 사귀었었다는 정보까지 들을 수 있었다. ㅋㅋ
오랜 연애를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플러스 요인이었다.
술이 좀 들어가면서 편해진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취미와 관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남자는 바이올린을 하고, 농구 동호회도 오래 했다고 했다. NBA도 즐겨 보고 요즘은 골프를 즐겨한다고 했다.
나는 카톡 프로필로 그 남자를 스토킹 했던 여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정말 흥미롭고 처음 듣는 정보인 것처럼 “우와, 바이올린을 하세요?” “저도 농구했었어요. 저도 농구 좋아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내가 나도 바이올린을 했었다고 말하자 그 남자는 같은 악기를 다루는 사람을 만났다며 매우 반가워했다. 그 남자는 악기를 그냥 취미로 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에서 수십 번 정도 공연을 해봤을 정도로 꽤 음악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 남자에 대해 알면 알 수록 그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숯불 때문에, 술 때문에 그리고 그 남자 때문에 내 볼은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같은 취미를 가진 우리는 말이 잘 통했다.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2차를 갔고, 조용한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는 본격적으로 플러팅을 시작했다.
2차 분위기는 더 좋았다. 많은 대화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날 이후, 그 남자는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 남자와 사귀기로 한 이후 곧바로 주말에 잡혀 있던 소개팅 애프터 약속을 취소했다.
그 남자가 맥주를 마시자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 남자와 지금까지 서로 얼굴도 모른 체 지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면 나는 그 당시 몇 주 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날 같이 있던 다른 남자 동료는 자신이 그 남자와 나의 소개팅 자리에 합석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 그리고 그날 그 남자는 나에게 대리를 불러주지 않았다. 대리를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