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결 - 타인과 나를 통과하는 일
아치를 무너뜨릴 땐 안에서부터 밖으로
아빠가 지금 내 나이일 때 그의 막내딸이 세상에 나왔다. 한자와 일본어에 능한 그는 직접 뜻을 골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거느릴 솔과 지혜 지를 짝 지었다.* 아름답다거나 여자아이라거나 하는 말은 없었다. 아이는 하나로 충분하지 않냐던 사나이는 훗날 지혜를 통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작은 아기에게 허무하리만치 금세 온 마음을 쏟아버렸다. 솔지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부인과 다투는 날이면 그는 꼭 테디베어 안듯 둘째를 품에 안고 집을 탈출하곤 했다. 그들의 동네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달리면 월미도에 닿았다. 다정하고 조악한 작은 테마파크에 앉아 굶주린 비둘기, 사나운 갈매기, 겁 없는 아기가 한 데 엉켜 먼지 구덩일 뒹구는 모양새를 바라보고 있자면 잠시 잠깐 근심이 잊혔다고 했다.
농담과 사람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진지하고 딱딱한 아내보다 가끔 만담도 받을 줄 아는 말랑한 여자가 어울렸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많은 결정들이 손을 떠난 뒤여서, 성격처럼 가벼운 한숨 한 번으로 빠르게 갈무리한 현실을 두고 그는 또 밖으로 나갔다. 웃음이나 격려 또는 인정은 밖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간과한 지점이 있다. 밖에서 만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식구는 아니었다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찰나의 웃음에도 마음 담은 말 한마디에까지 비용이 매겨진다는 거였다. 비용 때문에 그 남자의 주머니도 자꾸 가벼워졌다. 남자의 아내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단단해졌다. 큰 눈망울의 막내딸만이 그를 조건 없이 사랑했으며 구슬 굴러가는 소릴 내며 웃어주었다.
가정을 지키는 일과 사업은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남자는 경영엔 영 소질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어른의 세계에서 큰 감흥 없이 흐르는 십여 년 새 둘째는 벌써 십 대 소녀였다. 손 놓고 있어도 공평히 흐르는 시간 덕에 작은 아기가 예쁜 소녀가 되었다며 완섭 씨는 기뻐했다. 그의 딱딱한 아내가 경직된 마음을 깨 부셔가며 눈물로 키운 아이를 홀라당 데리고 나와 조수석에 태우고 인천공항으로 달리던 여느 드라이브 길, 문득 마음에 어떤 바람이 분 남자는 딸에게 물었다.
“아빠는 몇 점짜리 아빠야?”
어느 기업이든 바지사장은 절대 알 수가 없는 내밀한 요소들이 있다.
대체로 말단일 수록 그 지점을 상세히 알기 마련이다.
딸아이는 쉽게 답했다.
“... 60점?”
아빠는 어렵게 수긍했다.
이후 멀지 않은 미래, 가족 구조가 개편되었다. 남자는 난생처음 전담 양육자가 되었다. 큰 눈망울의 막내딸은 구슬 굴러가는 소릴 내며 웃어주긴 이전보다 덜 하나 여전히 그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 남자는 그 애를 통제하지도 재단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내를 깨부수던 그의 가벼움이 딸애에겐 휴식일 수도 있었다. 세상의 얄궂음이었다. 솔지는 그에게서 말랑한 머리와 언어 감각, 그리고 농담의 힘을 배웠다. 어려움에 정신없이 얻어맞을 때 단정한 해결책은 발아래를 받치지만 실없는 웃음 한 조각이 때론 결정적 숨통을 터 주기도 하더라고, 대체로 한심스러운 아빠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에게서 이모저모 떼어내 빚어진 아이였다. 그 애는 두 사람을 모두 꼭 닮았다.
솔지가 아빠 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문득 본닛 위에 걸쳐둔 발에 힘을 주어 아치 형태의 승용차 앞 유리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밀어 깨던 날이 있었다. 완섭 씨는 화를 내도 되었다. 소리를 치거나, 걱정을 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었으나 이 모든 반응 대신 폭죽이 터지듯 웃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딸만이 그를 그렇게 웃게 만들었다. 그가 택한 여자는 영 유머 감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와 함께 만든 미지의 존재는 그를 정신없이 놀래켰다. 속절없이 사랑하게 했다. 어떠한 화학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 남자도 저 여자도 기억하지 않는 먼 과거의 어느 시절에도 분명히, 두 사람 눈이 가닿는 모든 지점마다 색색의 불꽃이 터지곤 했을 것이다.
*작가의 본명은 거느릴 솔, 지혜 지.
사랑은 이해와 회복 사이에서 흔들린다.
멀수록 선명하게. 가까울수록 어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