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E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하다. 적당히 아는 사이거나 학창시절 ‘친구였던 이’가 출산했다는 소식은 십 년 전부터도 들려왔지만 그때는 무심했다. 그렇구나, 하며 사회적으로 학습한 반응을 기계적으로 돌려줬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르다. 여러 생각과 다채로운 감정이 일어난다.
E가 특별한 친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깊은 친구’라고 느끼는 존재가 많지 않다. 그마저도 가변적이라고 느낀다. 서로의 인생 한 순간 진실로 마음을 터놓고 자주 보며 즐겁게 지내다가도, 시간이 지나 서로의 방향성이 달라지면 서서히 멀어지거나 갑작스레 단절될 수 있는 게 우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음을 깊이 나누며 관계가 유지된다? 드물고 귀한 일이다. E와의 관계도 그렇다.
E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언론사 입사 준비 아카데미 수업을 들었을 때다. 나는 수업을 들은 뒤로도 계속 입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론사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언론활동 하는 법을 모색하다 직접 1인 잡지를 창간하고 발행하기로 했다. E가 잡지의 기고자이자 독자위원회 일원으로 활약하며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뒤로도 E는 많은 도움을 줬다. 부족한 예산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때, E는 식사를 대접받는 것 외에는 대가를 받지 않고 촬영을 도왔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E는 혼자 사는 나를 걱정해 과일과 죽과 반찬을 한 보따리 싸들고 집까지 찾아와 문 앞에 두고 갔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는 E의 반만큼도 다정하지 못했는데, E는 왜 나 같은 애랑 10년 넘게 친구하고 있지?
아마 이야기가 잘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며 분노하고, 같은 것을 보며 함께 웃는 사이니까. 모든 부분에서 생각이 같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관점이 일치하며 자주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으니까. 이를 테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지독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지독한 경쟁, 다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주의 사고방식, 그로 인해 ‘패자’가 겪게 되는 모멸감과 자기혐오. 점점 심해지는 빈부격차, 탐욕과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높아지는 자살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만날 때마다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끝없이 자기계발 해야 한다며 등 떠미는 사회를 사는 일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했다.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며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기후위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삶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비관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왜 E는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일까? E에게 묻자 그는 “이 사람(배우자)과 나 닮은 아이, 낳아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대답을 유전자를 남기고 싶은 본능의 결과라며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배우자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에 내린 계급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곳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였다.
- 결혼·출산은 물론 연애조차 하기 싫은 사람 나야 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를 부부를 보며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아주 옛날에는 그런 것을 꿈꾼 적 있음이 떠오른 것이다. 이 역시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 동안 여러 일을 겪고, 잘 몰랐던 스스로를 알아가며 그 생각은 변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있다. 연애라는 관계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한 시기가 있었다. 쉬지 않고 연애를 했는데, 구애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게 끌리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너무나도 쉽게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애정결핍이라는 개인적 문제와, 당시 한국이 너무나도 연애 권하는 분위기였다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그렇게 쉽게 연애한 대상 중에는 개차반도 있었다. 성적 대상과 소유물로 대해질 뿐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각과 그로 인한 모멸감, 믿고 내보인 가장 여린 속내가 상처내기 위한 말과 협박으로 돌아오는 경험, 한국사회가 스토킹으로부터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몸소 알게된 일(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들은 트라우마를 남겨 타인과 안심하고 연애하는 일을 두렵게 만들었다. 사랑과 연애조차 두렵고 어려운데 결혼과 출산? 관심도 흥미도 없다.
게다가 홀로 생계를 꾸리고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일상에 제법 만족하고 있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현실은 나를 쪼잔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불안에 빠뜨릴 때도 있지만, 자긍심과 자유롭다는 감각을 줄 때가 많다. 탱고 덕이 클 것인데, 여가 시간도 만족스럽게 보낼 때가 많다. 나는 이런 삶이 결혼으로 인해 질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진다. 좋은 결혼은 아끼고 배려하며 보살피고 돌봐주는 사랑과 호혜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겠지만, 불행히도 ‘웬수(원수가 표준어지만 웬수의 발음이 더 정서를 잘 표현하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겠다)’만 생기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안다.
심지어 그 웬수가 한 명이 아니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여럿 딸려오는 경우도 많다고 알고 있다. 결혼을 두 개인이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아닌 집안 간의 결합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아직도 한국에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역할도 고정 지으며 여성에게 살뜰한 ‘며느리’ 역할을 요구하고 결혼생활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킨다. 게다가 혼자 살면 1인분만 책임지면 되지만, 동거인이 늘어나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총량이 늘어난다. 그렇게 늘어난 일이 모두 내 몫이 된다면? 내가 가사노동 할 동안 남편은 헤드셋 끼고 게임이나 하고 있다면? 웬수로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다.
- 도래하는 초고령 사회
웬수와의 결합이 두려운 데 더해, 앞날에 낙관을 가지기 어렵고, 1인분의 삶을 살기에도 버겁기에 혼인율와 출생률이 그토록 낮은 것 아닐까? 계속해서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통계를 여기서 또 일일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태어나는 아이는 적고 사람들은 갈수록 오래 살기에 머지않아 한국이 초고령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널리 퍼져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황당하게도 젊은 여자들을 탓한다.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여자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동의 되지 않는 말이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개인의 행복만 챙기는 일이 아니라면,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해야 할 의무를 하고 있다면, 개인이 내린 합리적인 선택을 타인이 비난할 자격 있을까?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들은 임산부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남의 몸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쉽게 말하며 통제하려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가까운 친구가 겪기 전까지 임부의 어려움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소중한 친구가 임신을 하니 얼마나 몸이 힘들지 가늠하게 되고, 마음이 쓰이며 일상의 불편을 헤아리게 된다. 출산 뒤에도 문제다. 친구가 아직 아이를 떨어뜨려 놓기 어려울 때 그와 어떻게 만날까 생각하니, 아이에게 관용이 부족한 공간들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고령화와 저출생이 걱정된다면 ‘행복하려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출산을 포기하는 일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경쟁에서 패했다고, 가난하다고 멸시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나 성별, 연령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가 존중받으며 생의 불안을 경감시키는 사회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출산 장려’를 위한 술책이 아닌 우리 모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시급한 일은 아이에게 친절하고 관용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소중히 대하지도 않으면서 새로 아이를 낳으라는 태도를 가진 이들을 볼 때면 쓴웃음이 나온다. 좀 더 아이를 포함한 약자를 감싸고 돌보는 분위기가 한국사회에 필요하다. 그리고 동물행동학자에 따르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단지 극심한 경쟁 때문에 돌봄을 향하는 본성이 눌러졌을 뿐 교육하며 문화를 바꾸면 우리의 본성이 복원될 것이라고 학자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E 역시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리라는 희망과, 변화에 일조하며 목소리 내겠다는 결심으로 출산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