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medy Feb 23. 2017

답답한 일기

답답해 ㅠㅠ

답답


나는 웬만하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는 편이다. 그 사람이 누구를싫어하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마약을 하던 그저 이야기나눌 수 있고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웰컴이다. 그런데 이런 나도 답답한 사람은 참지 못하나 보다. 바보 같아서 답답한 것도, 똑똑해서 답답한 것도 아닌 그저 자신들이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처럼 구는, 특히 그런 “기독교인”들과 나는 아직은 죽었다 깨어나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사회적지위와 나이가 그렇게나 기독교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경험이 많으면 꼬투리를 잡아도 된다는 성경말씀이라도 있는지, 그저 소리지르고 끊임없이 한계를 요구하며 내 능력에 선을 긋는 사람들을 나는 너무나도답답하게 생각한다. 넌 못해, 넌 잘해, 넌 ~~야, 그건 아니야등 나를 잘 모르는데 어째 저리 단호히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참 궁금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곁에는 이러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있었다. 그사람들의 눈치를 나는 끊임없이 보고 행동을 해야 했고, 믿음 보다는 두려움으로 행동해야 했으며, 치유보다는 상처를, 이해 보다는 오해를, 대화 보다는 싸움을 선호했다. 한 명 일 때는 그래도 나름 버틸만 했는데, 이제 두 사람, 세 사람이 되어가니 죽을 맛이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은 마치 고전 과학소설 같은 것들 뿐인데, 어째서그 안에 있는 새 책표지는 보려하지 않는걸까. 


나는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 또한, 내가 서서히 지속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라는 것도 믿지 않았으며, 많아야 한 두 번 짠 하고 바뀌겠지 라는 정도의 기대감과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절망감이 섞인 무언가에매달리는 심정으로 했던 이야기였을 뿐이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나의 헌 겉모습을 떨쳐내려 한다는것과, 실제로 많이 떨쳐 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나를 짧게 알고 지낸 사람들도 그 짧은 시간 안의 변화를 잡아낼 수 있는데, 이 세 사람은 나름 나랑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내가 태워버린 조각들만 바라보고 찢어버린 책장들을 틀렸다 이상하다 고쳐야 한다며 윽박지르고 있다. 그건 내 책이 아니에요! 라고 열심히 외쳐보지만 그들은 내 새 책에아직 수정되지 않은 부분들을 보며 이건 뭔데? 라고 반문한다. 예수님의능력은 남는 것이 아니라 바뀐 것에서 보여지는 것인데 남아있는 것만 보려 하니 나에게 하신 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가 보다.


나는 나에게 있는 예수님의 향기가 무엇인지, 하나라도 있는지 여러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평화를추구하지 않고, 참을성이 없으며, 자비롭지 못하고 어질지못하며 충성심도 없고 절제하지 못하며 온순하거나 온화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시기하고분노하고 갖은 술수를 써대니 어쩌면 그들이 나의 허물만 보는 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허물 밖에 없기에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든다. 나 역시 나의 허물만 보이기에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이 먼저 들고 바뀐 것에 감사하다가도 바뀌지않음에 원망을 하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느껴보았냐 라는 물음을 받으면 대답하기 조금 망설여 진다. 그가 가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여러 번 느껴보았지만 글쎄, 나에대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느껴 보지는 못했다. 아 그저 나를 가끔 도와주시는 구나 정도는 있지만 와 나를미친 듯이 아껴주시는구나 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해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간증은나 보다는 타인에 항상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시는 마음을깨닫게 하셔서, 나에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게 하셔서 역사를 하셨지만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것은 나의대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예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만솔직히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선뜻 이야기 하지 못한다. 물론, 만일 질문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라면 예스 라고 하겠지만. 뭐랄까, 의미 없는 따뜻함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있다. 홀로 기도 하고 한탄 할 때 누군가가 있어준다는 기괴한 기분, 양심이닳고 닳은 내가 죄를 지을 때 나를 슬프게 쳐다보는 누군가의 눈초리, 누군가가 나를 버려 우울해 질때 절대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목소리는 전부 사랑 보다는 동정, 연민과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의 한계점, 마음으로 아는 것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일종의 믿음이라는 종목에서의 한계점을 어느 정도 느낀다. 맹목적인 믿음은 지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기에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려 여러 노력을 해야겠지만 그저 바보 막내로 지내온 것에 익숙해진 나는 무언가에 선뜻 나서지못하는 것도 있는 듯 하다. 


“성경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믿음은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세 목사님과 전도사님한 분의 공통적인 대답에서 나는 나의 성경공부의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나의 성경공부의 목적은전도를 조금 더 잘 하기 위해서 인데, 성경에서는 단 한번도 지식을 사용해서 전도를 하라고 한 적이없다. 오히려 지식뿐인 믿음을 좋지 않게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이걸 이해하지 못했고, 목사님들의 의견과 나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 답답했었다. 지식은 이파리 이며 열매와는 다른 것임을 인지하지 못한 나의 실수이다. 이런간단한 것 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뭔가 대단한 놈이라도 된 것 처럼 글을 쓴다, 답변을 쓴다 하며 설쳤던 자신이 답답하고 한심하며 안쓰러울 뿐이다. 성경에대한 이해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설교로 듣고 성경을 읽은 것을 서로 이어가며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는 잘못된, 혹은 다른 이해 라는 것은 진정 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기도가 없을 때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모든 것을 이해 하는 데에는 나에게 하나님을 이해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 같다. 이래서 하나님을 사랑함만 있다면 성경을 잘 몰라도 된다고 한 건가? 그렇다면성경을 평신도 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 으로서의 특혜가 아니라 그 지식이 자신의 믿음에 필요하거나 그것이 쓰임 받기 위해서 라고 보는것이 지식이 믿음의 필요조건이라던가 지식과 믿음은 비례한다는 것 보다 더 옳은 이야기가 아닐까?

 

지식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은 어쩌면 내 연인이 과거에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모르고 믿는다 라는 것과비슷할 수도 있다. 나는 지속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과거에 했는지 알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째믿음에도 반영이 되나 보다. 딱 한번이라도 내가 아는 것과 다른 행동을 했었다면 그 행동을 왜 했는지집요하게 찾아내려 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찾아냈을 때 그 사람을 더 이해할 수 있고 그들에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희망때문이다. 


길을 걸을 때 뛰어 넘기도 하고 장애물을 이용하기도, 베어버리기도, 찍어 버리기도 하고, 예쁜 것들은 모으고 더러운 것은 씻어내고 궁금한건 연구해 보면서 때론 천천히, 때론 빠르게 나아가야 하는데, 이길의 속도 제한은 다른 곳 보다 미친 듯이 낮아서 한걸음 한걸음이 마치 굼벵이 마냥 느릿하게 느껴진다. 물론길을 가는 목적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가보지 못한 곳을 천천히 구경하며 넘어지지 않고 가는 것 이기에 상관은 없다만. 그러나 속도 제한을 무시하고 부스터를 쓰던 내가 부스터는 커녕 내 스스로 차를 밀고 있는 꼴이라니, 뭔가 매우 한심해진 듯한 느낌도 들고 갑갑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저 끝에는, 저 아름답고 거대한 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저 곳에는 쉼이 있겠지, 달콤한 후식이 나를 기다리겠지 하며 매일 매일 조금씩, 때론 멈춰가며때론 한숨 쉬며 끝까지 가는 그날 까지, 나는 여전히, 뒤를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가고 있다. 


죄책감을 가질 자격이 없는 내가 죄책감을 가지고 늘 우울해 있는 것도 꼴불견 이라면 꼴불견이다. 삼사년은 족히 넘은 죄책감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생긴 놈들까지, 꿈에서조차 나를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 나는 언제쯤 편안히 잘 수 있을까. 꿈에서 별별 사람들이 다 나오고 있다. 시대와 배경을 콜롬버스가우주선을 타듯 넘나드는데 그 어찌도 아름다운 광경인지. 


늘 도망치기만 하는 나 자신은 답답함의 결정체이다. 도망치고 도망쳐서결국 일을 크게 만들어 버리는, 완벽하지 못한 사태 대비에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나는 결국남들이 뭐라 칭찬하던 비겁한 겁쟁이일 뿐이다. 

모르는 문제에 대한 깨달음은 물론 좋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려 짜증이 날 정도다. 빠른 것을 선호하는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궁금한 것을 알려주시는 그 속도가 너무나도 느리게만 느껴진다. 하루에 30개씩 알았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고작 한주에 한 개 꼴이니, 어떤 때에는 감사함 보다는 원망이 더 생기기도 한다. 내가 이 문제때문에 얼마나 오래 고민을 했는데 한 순간에 이렇게 알아버릴 수 있는 문제였더라면 좀 더 일찍 알려주시지 그랬냐는 원망 아닌 원망을 날려본다. 하나님의 시간에 올바른 타이밍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내 타이밍에는완전 늦은 시간이니까. 다만 나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닫는 것, 그 하나로 만족을 해야 하나보다. 


몇 일 전 볼링을 치러 갔다가 옛날에 한참 하던 오락기를 보았다. 처음보는 격투게임인데 아빠가 오랜만에 재석이 깨지는 것 좀 보자고 하셔서 설렘 반 기대 반으로 1불을 넣고게임을 시작했다. 모르는 캐릭터가 산더미라 다른 게임이나 영화에서 봤던 울버린, 캡틴 아메리카, 제로로 게임을 시작했고, 게임천재 신재석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될 거란 아빠의 기대와는 다르게 내 손가락은 옛날 내 전성기 시절 감각을익혀나갔다. 타다닥 타다닥 내 손가락이 움직일 때 마다 그때의 그 환희가 몰려왔다. 점점 머리가 하는 일이 적어지고 각 패턴을 첫 게임 만에 익히고 난 후 모든 것은 나의 날아다니는 손에게 맡겨져있었고, 5단계 까지 무사히 마치고 6단계를 들어가려던 찰나, 나는 부모님의 바랭을 보고 말았다. 그건 단순한 실망과 경멸의 눈초리가아니었다. 현재의 나에서 과거의 내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하시는 그 눈길. 나는 그 눈길을 받고 내가 이제는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제길, 내손가락은 결국 6라운드 까지 이겨버리고 말았다. 내가 무언가를하면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일부러 가드를 풀고 풀 콤보를 3연속으로 맞았다. 마치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 듯 왼손은 의미 없이 앞뒤로 레버를 흔들고 있었고 내 오른손은 점프 스페셜, 즉 막지 않는 공격을 해댔다. 결과는 물론 패배.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기분이 나름 좋았었다. 나는 오늘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갔고, 거기에 있던어른 한분을 작살을 내 드린 다음에 두판을 했는데, 하면 할수록 뭔가 허망하고 허무한 느낌만 가득했다. 교회 사람이 보면 안 되는데, 아시는 분이 보면 안 되는데 라는생각을 하며 하는 게임은 그저 답답할 뿐이였고, 나의 게임폐인 과거를 나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에감사함과 동시에 그 희열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하는 나에 대한 경멸감을 느꼈다.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것은 공존하지 못하는데 왜 사탄은 나에게 둘이 공존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인가. 


나에게 인간관계란 하나의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가끔가다 넌 왜 그렇게 사람을 다 아는 체 하냐, 어떻게 그렇게 예상을 잘 하냐 라고 물어보는데, 나의 비결은 바로 사람을 하나의 길로 생각하고 어떤 길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가시 밭인 사람은 가시를 없애고, 가끔가다 마음 한 가운데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성채를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불러오기도 하고, 들어가서 한번휘저어 놓기도 하고 가시에 찔리고 베이기도 하면서 마음의 중심부 까지 다다르는 일종의 길로 생각을 하면 사람들의 비슷한 점과 행동패턴이 눈에 잘보이게 된다. 나는 그래서 어느 정도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나와이 길의 끝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나는 여행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길은길대로 가만히 있으니 이건 마치 1+1은 2라는 수학만큼이나간단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쁘게 끝날 관계도 기적을 바라며 맺곤 한다. 결국 길은 길대로 파헤쳐 지고 나는 나대로 피폐해 지는데, 길의파헤쳐짐은 곧 새로운 생태계의 시작이기에 미안한 마음 보다는 차가운 마음이 앞선다. 끝을 알기에 두렵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나의 방식은 바뀌지 않고, 그렇기에 끝은 결국바뀌지 않는다. 나의 방식이 바뀌려면 끝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기에 그 끝은 바뀌지않는다. 나는 지금 끝을 아는 관계를 여러 개 맺어가고 있다. 나는나의 끝에 대한 감각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사람의 불확실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할까,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생각나는 것들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상관 없었는데, 쌓이고 많아지고 또 대상이 바뀌니 머리가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내가 이래서 연애를 드럽게 못했나 보다. 끝이 현재보다 더 가깝게보여서. 


J.A.J.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일기, 그리고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