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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May 12. 2017

일기 - 모르는 후광

근황과 믿음


일기 – 모르는 후광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좋건 싫건 매주 만나야 하는 사람들, 미우건 이쁘건 인사해야 하는 사람들, 착하건 못됐던 품으려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주, 매일 늘어만 간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니 쓰지 못하는 일들도 늘어만 가고, 말할 것을 할 수 없고 하고픈 것을 하지 못함에 답답함만 늘어간다.


이렇게 교회라는 곳에서 봉사하다 보면 반드시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적인 부분이나 단정한 용모에 세상 어디에 나가도 별로 꿀리지 않을 것만 같은 백그라운드를 가졌으며, 마음도 따뜻하고 이야기도 잘하는 정말 대단한 형, 누나들 말이다. 나는 이런 후광이 단순히 잘 생겨서, 예뻐서, 돈을 잘 벌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감, 그냥 단순히 내가 잘났다 라는 자신감이 아닌 자신의 못남과 하나님의 강함을 알고 있는 것에서 나오는 그 특이한 자신감은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우러러 보게 만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을 헌신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바빠서, 귀찮아서 라는 단어는 마치 그들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듯 했고, 놀 때 열심히 놀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하는 우직한 소와 깜냥 많은 광대, 그리고 그들 모두의 모습에서는 성경이 이야기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 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기에 그들의 삶 속에는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을 성경으로가 아니라 직접 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 질지 두려운 마음이 슬금슬금 머리를 디민다. 예수님과 관계가 안 좋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세상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이기에 나를 볼 때 무엇을 볼까 라는 것은 생각보다 나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말이 좋아 세상이지 실제론 사탄과 다를게 없으니까.


그들은 부드러워서 쉽게 뜯어지고 부러지고 망가질 것만 같지만 그런 부드러움은 잠시, 우직하고 강인한 무언가가 슬쩍 보인다. 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행실이 바르고 늘상 열심히 하는 것 처럼 보이는 모습은 그저 겉모습일 뿐,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짜증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거듭났는가 라는 질문에 예전에는 예! 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면 지금은 글쎄요 라고 말끝을 흐릴 수 밖에 없고, 성경을 잘 알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 역시 예 라고 대답했을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눈을 내리깔고 아니요 라고 말할 것 같다. 그들의 후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나에게는 없을 그 후광을 멀찌감치 바라만 본다.


나는 분명 예수님을 품었을 때가 있었다. 한없이 다른 이의 고통에 눈물짓고 아파하고 도와준, 그런 때가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 순수했던, 감사로 가득했던 때 보다는 많이 나약해지고 가식적으로 변한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설득하려 들어도 되려 내가 설득 하게 도와주실거라는 믿음은 온데간데 없고 나는 비뚤어지고 해진 허리띠와 종이 호심경, 찢어진 신발, 갈라진 방패, 그리고 무딘 검을 힘겹게 질질 끌며 이리 맞고 저리 붙들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모습이 부끄러워 말도 안하고 숨어보려고 하지만, 이미 양지에 너무 드러나게 되어 음지로 도망치지도, 양지에 두발 뻗고 있기도 애매한 여정이 되어버렸다.


알던 사람들에게서 근 몇 달간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만나고 싶지만 보고 싶지는 않은 꼬맹이들과 나름 반가운 후배, 그리고 몇몇 전부터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후광을 보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서도 후광이 보이는데 정작 기독교인이니 순장이니 봉사니 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기만 하다. 그걸 받는 사람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할 수 없기에 더욱 더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이 인간적인 잣대로 보았을 때에 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는 불공평하다. 모두를 사랑하시긴 하나 그가 챙겨주고 돌봐주고 위하는 사람들은 이쁨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적다. 성경에서도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진 않으신다. 언제나 선택받은 소수의 이야기, 그리고 죽어야만 하는 다수의 이야기로 성경은 역사를 풀어나간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불공정성을 부각했기에 예수님이 신약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라는 의미없는 이야기를 하셔야 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이 더 사랑을 받았을 뿐이니까. 사라진 하나의 양을 찾아 떠돈다는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내 주변에도, 또 성경에도 그와 반대되는 사건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그래서 늘 마음 한켠에 불만이 있었다. 나는 그 소수가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느꼈고, 또 심지어 내가 어찌어찌 해서 그 소수 안에 들어간다 해도 뭔가 불공정성에 의한 로또 당첨같이 불합리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누가 나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다고 하던,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던 뭘 듣던 짜증부터 내게 된다.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받기에 타인도 당연히 사랑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그 안일한 생각이 짜증이나고, 나에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는게 보여서, 느껴져서 짜증이 난다.


나는 이 "선택"의 기준점이 무엇인가 못해도 천번은 고민해본 것 같다. 그들이 좋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조차 하나님이 신경쓰시는걸 느낀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만 그런 것도 아니다. 부자집에 여자 줄줄 대리고 다니던 애에게서도 그걸 느낀 적이 있다. 사람들이 못생겼다 한 사람에게서도, 잘생겼다 하는 사람에게서도, 따뜻하다 이야기 한 사람에게서도, 차갑다 이야기 한 사람에게서도 아 하나님이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라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되곤 한다.


나의 이 고민의 문제점은 바로 이거다.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이야기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안된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성경의 아름다운 부분에 매료당해 구약의 고통받는 사람보다는 신약의 달콤한 말을 이야기 할 사람들이니까.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안된다. 그들은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셔, 너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거야 라는 결과론적으로 뻔하디 뻔한 이야기만 하고 넘어갈 거니까. 교회에 오래 있었던 사람도 안된다. 그냥 익숙해서 하는 말일거니까. 교회 내 리더들이나 높은 위치의 사람들 역시 안된다. 눈치를 보고 있을테니까. 그럼 남는건 비 기독교인들 뿐인데, 이 사람들은 나에게 뭔일이 일어난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이야기를 안할 것이다. 그럼으로 그 누구도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시킬수는 없을게다. 말 그대로 나를 설득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이라는 이야기다.


난 집단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집단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두가지 눈치는 장착해 두었다. 슬프게도 어느 교회를 가던지 거짓과 불신은 판을 친다. 가식도 많고 눈치도 많다. 나를 활짝 웃게 하는 것 보다 축 쳐지게 하는 모습들이 내가 사람들의 베이스라인을 알게 될 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내 일기는 전적으로 내가 이야기를 토해내는 곳이다. 답답함, 두려움, 슬픔과 괴로움을 한데 뭉쳐 걸러내지 않고 나오는 그대로 밍그적 밍그적 끄적이는 글이 일기이다. 그러기에 나의 일기들은 정말 순화되지 않은, 그래, 그러니까 "기독교인" 답지 못하고 "리더" 답지 못하며 "바보" 같고 "이상한" 무언가가 잔뜩 있다는 말이다. 원래는 이런 일기를 쭉 써서 쨘 하고 올리곤 했는데, 내가 맡은 바가 많아지고,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갈 수록, 아는 사람이 많아 질 수록 이러한 이야기를 터놓을 이발사의 대나무 숲은 사라지는 듯 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시원스레 소리질러 재껴야 하는데 임금님…..! 임금..! 만 하는 기분이 든다. 쓰고 싶은건 많은데 보여지고 싶은건 많이 않음에서 오는 딜레마랄까.


문든 궁금해 진다. 후광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낼까. 후광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분명 솔로는 존재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솔로지만 썸타는 솔로일 수도 있다는 슬픈 생각, 그리고 그 후광은 파트너가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어이없는 결론과 그 결론이 사실이라면 난 영원히 망했다는 가혹한 현실을 받아드리려 노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짧은 숨소리를 마치련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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