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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Jul 04. 2017

회색

누군가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물어보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회색이라고 말한다.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 하기에 나는 재빠르게 검정도 파랑도 하양색도 좋아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럼 그들은 아 뭔가 말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야기를 한다.


내가 회색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마 3학년 때 미술 시간이 아니였을까 싶다. 검정과 하양색을 적절하게 많이 섞어 조금 짙은 회색을 만든 나는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을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려보았다. 팔레트에 덩그러이 누워있는 커다란 회색 풀밭에 퉁 하고 떨어진 암 같은 방울들은 서서히 퍼져나가다 그 회색 풀밭에 삼켜져 있는 듯 없는 듯, 다만 조금 더 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빨강 초록 노랑같은 화려한 색들은 다른 색이 들어오면 바람난 여자마냥 슝 하고 태도를 바꾸지만 회색은 마치 지조를 지키듯, 비밀을 지키는 문지기 처럼 그 색을 되려 먹어치운다. 핑크빛 회색은 곧 떨어지는 다른 색과 함께 거뭇거뭇한, 하양이 있는 듯 마는 듯한 색으로 변해간다. 남을 숨겨주며 자신이 점점 어두워지는 그 신기한 모습에 나는 회색을 신기한 색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런 회색 사랑은 나의 발명품 대회에서도 슬쩍 보였다. 나비를 잡아라 라는 거울을 이용한 장난감으로 교내에서 금상을 탄, 나에게 글로리의 3학년을 가져다 준 그 첫 작품의 겉은 회색, 아니 정확히는 은색 이였다.  나는 그래서 회색을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색으로 생각하곤 했다. 회색 양말에 회색 속옷, 회색 신발, 윗도리 바지를 입는 날이면, 거기에 날씨까지 흐릿하면, 나는 마치 내 삶의 지휘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수많은 관객들에게 나의 모습을, 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자 하는 지휘자의 설레고 떨리는 그 감정을 한조각 공유하는 듯 했다.


나는 나를 회색과 닮은 사람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평범한 중간에서 편견도 믿음도 의심도 없이 누군가를 대하려 노력했다. 이 중간이 가끔가다 붉고 푸른 색에 오염이 되더라도 그 오염을 되려 삼켜 감추어 주는, 단지 조금 어두워지는 역할을 하게끔, 너무 조금 달라져 다른 사람들은 눈치도 못채게끔, 넒고 편안한 회색이 되려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회색의 사람이라 표현한다.


나를 회색이라 표현하면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을 재미없는 사람이라 표현한다 생각하곤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회색됨은 일종의 약속이다. 나에게 노오란 두려움을 퍼부어도, 파란 질투를 흩뿌려도, 붉은 분노를 찍어대도 수많은 물감이 섞인 물통의 회색처럼 그대들의 색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말이다.


아, 그냥 여행이 끝나고 조금 우울한 생각이 들어 내가 오랜시간 쓰고 싶었던 회색에 대한 글을 쓴다. 거창하고 화려한 말로 쓸까 생각했지만 나는 회색이기에, 이 글은 푸르지도, 붉지도, 생기 넘치지도 않아야 하기에 길게는 말고 짧게도 말고 그냥 딱 여기에서, 그래, 여기에.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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