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medy Jul 18. 2017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차이점 - 2

깨달음

나의 지난 글,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차이점 - 1은 생각보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하루에 수십명, 어떤 때는 수백명이 넘도록 읽는 글이 되었다. 


아마 사람들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차이점에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다. 그러니 찾고 찾고 또 찾다가 어쩌다가 브런치 까지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사실 이 글을 시리즈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제목에 -1이 들어가게 되었고, 오랜만에 유레카 모먼트가 있어서 두번째를 쓰게 되었다. 


나는 비기독교인이 절대 기독교인이 되지 않고서 가질 수 없는 것은 "믿음"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가? 이 믿음은 신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기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음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분명 이러한 관계가 두 그룹을 구분짓는 기준점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 신과의 관계는, 인관관계와 마찬가지로, 생각보다 복잡한 법칙과 룰을 따르며, 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는 맺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이 둘의 차이점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은 먼저 자신이 무한한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부모의 사랑, 친구의 관심, 연인의 애정은 모두 어느 특정한 때에 시작되었고 언젠가는 끝날 감정이지만 신의 사랑은 나의 존재 자체를 영원히,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기도할 때에, 누군가는 지쳤을 때, 화났을 때, 슬플때, 기쁠때, 행복할 때 등, 아 나는 정말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 심리학 적으로, 사람은 보통 더 당당해 진다. 자신이 쓸모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패보다는 신을 통한 성공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신의 실패를 당연시 하지만 신과 함께있을 때 성공 역시 당연한 것이 된다. 이로인해 기독교인은 점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실패를 하는 것 보다는 신의 뜻을 따라 성공하는 쪽을 택하게 되며, 잦은 성공에 자신감이 높아지곤 한다. 이러한 행동은 오지를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매우 위험한 곳에서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오히려 당당함으로 그들을 맞서는 행동은 비리비리한 자신의 힘이 아닌 신의 사랑으로 보호받고 있음을 인지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당당함이 자만심으로 바뀌는 경우도 빈번히 있다. 


기독교인은 주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일을 하는 편이다. 이는 용서, 왕따에게 다가감, 화를 참음 같은 작은 것에서 회사에 일찍 가고 늦게 나감, 쓰레기를 주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챙겨줌 같은 좀 더 크게 보이는 일들 역시 포함된다. 그 누구도 하고 설겆이 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 무거운 것 들고 싶지 않을 때, 먹고 수다떠는 무리와 함께 있고 싶을 때, 뒤에 앉아 눈에 띄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의 편안함 보다는 누군가의 작은 힘과 용기를 위해 움직이는 편이다. 이는 바로 신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위대함을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꾸는 힘을 상대방에게도 부어주고 싶은 마음은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먼저 주신 사랑으로 통해 바뀌는 것이기에 이러한 소소한 이타심이 생기게 된다. 


신기하게도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기 시작하곤 한다. 조금 더 깊은 것에 대해 알게 되고 이미 수천번 들어 알고 있던 내용들이 드디어 말 뿐이 아닌 의미가 스리슬쩍 고개내민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이 알게 됨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과 일맥상통한 것들을 깨닫게 된 순간 그들은 그것을 온 세상에 내질르고 싶어하게된다. 마치 오바마와 친분이 있는 사람인 마냥 자랑스럽게 신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게 된다. 이 열정은 상대를 내가 믿는 신을 믿게 하자 라는 생각 보다도 그저 자신이 알게 된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은 열망과 그 열망을 품게 해준 신에 대한 감사함 혹은 사랑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인이 되자 마자 뿅 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인 교리가 아닌 신을 앎에 의한, 1대1의 신앙, 믿음, 교리를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은 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혀 말도 안되는 일일 때도 있고, 내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 일수도 있고, 어쩌면 광야로 떠나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일수도 있다. 비기독교인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예수라는 존재를 구원자로 인정하는 순간 그 기독교인 된 비기독교인의 삶의 방향키는 신이 쥐고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점점 하게 되고, 또 무엇을 원하시는지 더 묻게 된다. 또한 물었을 때 받은 답변을 행하면 성공을 하기에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작은 것 하나라도 신의 확증을 얻기를 원하게 된다. 


나는 최근에 믿음이 하나님이 사랑을 통하여 나를 설득하신 것이라는 것과 이 믿음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성경을 깨닫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알아감과 깨달음 역시 하나님에게로 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냥 멋있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를 Devine persuasion (신의 설득), Knowledge about Devinity (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 그리고 Devine revealation (신이 주신 깨달음)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하니 이 세가지가 바로 믿음의 중요 핵심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그러나 망가지고 더러운 존재임을 언제나 설득하신다. 인간은 그 중 하나 혹은 둘 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때로는 무지 때문에 그 사실을 무시하고 반박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 특유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설득하시고 자신이 낮은 곳에 있음을 그 사람이 인지하는 순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받음 역시 깨닫게 된다. 설득 당한 소수는 그의 사랑안에서 보호 받으면서 살다가 문든 그런 생각이 든다. 나를 보호해 주는 이 존재는 뭘까? 그래서 인터넷도 찾아보고 기도도 하면서 언듯 언듯 그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그는 나를 전혀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내가 넘어진 그 어떤 순간에도 그는 변함없이 나를 받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서로를, 어쩌면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는 인간에게 명령같은 부탁을 하시기 시작하신다. 저 사람을 도와 주어라. 혼자 있고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가슴에 구멍난 것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라. 광야로 가서 나의 위대함을 보여 너를 통해 내가 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게 하라는 메세지의 조각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담대히 나아가 온 세상에 그의 말을 퍼트리라는 구절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것, 보잘것 없는 깨달음을 춤추고 기뻐하며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믿음이란 이러한 그와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내가 내 친구를 믿는 이유가 그들을 알기 때문인 인 것과 같이, 신을 모르는 믿음은 어쩌면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를 알기를 갈망하지 않는 믿음은 멈춰져 있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손을 내밀고 있는 쪽은 신 이기에 멈춰져 있는 관계를 다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되려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나는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차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설득을 통해 설득당하고, 신에 대해 알게 되어 관계를 맺고, 그가 주신 그의 사명과 지식은 분명 기독교인을 비기독교인과 구분짓는 무언가 이며 이는 곧 신과의 관계이자 내가 그렇게 원하고 갈망했던 "후광"인게다. 


3일을 지웠다 썼다 한 문단도 제대로 끝맞추지 못했던 글이 기도를 하고 찬양을 들으며 쓸 때 막힘없이 쓰였다는 것은 이 글의 퀄리티가 낮음을 의미하거나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거나 하는 쓸데없는 가정보다는 아마 나의 특정 토픽에 대해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그로부터 왔기에 그렇다는 것을, 그래서 그에게 온전히 집중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련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무궁무진함으로, 그를 절대 완벽히 이해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점 시리즈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평생. 


J+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들 - 2016 040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