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의 묵상집
09.25.2018
요한1서
Q1. 교제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교제란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투에 임할 때 전우를 믿으려면 그 전우가 내 뒤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성격을 알아가며 확인하게 됩니다. 교제란 그러므로 서로를 알아가며 보호해 주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카탈리스트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포함된 교제를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비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Q2. 우리는 이러한 교제를 하고 있나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람들은 복음이 쉽다고 이야기 하지만 오늘 목사님이 설교하신 바와 같이 복음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복음의 완성형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그것을 보이게 되며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교제를 매개체로 복음이 전달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활성화 되지 않는 "교제"는 올바르지 못하거나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교제를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타인에게 조언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자주 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쉽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제를 지속시키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다가 곧 다시 나의 힘으로 하려고 해서 금방 지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여전히 SS 형을 만나고 싶지 않고 은연중 JKT 전도사님이 떠올라 M 봉사단에게 전화도 메시지도 안하고 있습니다. HJ 누님과 이러한 교제를 가지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이기도 합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안타까워 하지는 않고 분노하고 짜증만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이 미미한 관계, 그러한 교제가 많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JF형도 매한가지구요. "아무래도 인간이다보니"라는 합리화를 버리기가 힘들고 또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들 피하고 싶은 사람들 피하며 지내는데 나도 몇 사람 좀 피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그 사람들을 만난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도 않을 인간들인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라는, 나 중심적인 생각이 저로 하여금 온전히 이타적인 교제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09.30.2018
우리는 분명 듣기를 더디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를 성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언제 그랬는지, 그때의 결과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다면 어떻게 결과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프레임이 생기고 그 프레임이 부정적인 경우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성급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HJ 누님과 SS형 일 것 같아요. HJ 누님과는 첫 만남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첫 만남에 휴학과 성 소수자 등 이야기를 해서 무시를 당했었고, 만날 때 마다 아랫사람 다루듯한 느낌으로 저를 대하곤 했습니다. HJ누님에 대한 좋지 못한 프레임은 HJ누님이 그냥 어린 아이일수도 있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보다는 뭔가 일부러 타인을 상처주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재수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그 모델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HJ누님의 생각을 조금 더디게 성내고 더디게 말하며 이해했다면 아마 지금쯤 어느정도의 변화가 있을수도 있을 것 같아요.
SS 형은 원래는 괜찮았지만 그때 비합리적으로 행동한 후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화를 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까지 잘 지낼수도 있겠죠. HJ 누님은 잘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입맛대로 사살아가지는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줘서 좋은 건지, 아니면 화를 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건지.
내가 화를 내지 않아야 할 때 화를 내서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보여지지 못한 때가 언제 있나요? 우리는반대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화를 냄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분노는 무조건 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까요?
적은 경우 나의 분노가 사람들을 안정시켜준적이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의 화는 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물론 부정적이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는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노하는 것의 문제점을 이야기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가장 크게 분노했던 일은 무엇이고, 그 상황에서 분노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다음에도 그러한 일이 생기면 이제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분노로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순수한 분노, 악의로 가득차게 되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온 세상이 붉게 변하는 듯한 느낌과 어느새 그녀석을 무자비하게, 광기에 사로잡혀 때리던 그 순간, 명백한 건 사람들이 제 모습에서 본 것이 "하나님"은 아니였다는거에요. 이렇게 뜨거운 분노도 있었지만 또 한없이 냉정하고 냉담했던 그때도 잊을 수 없어요. 아직 어리고 미숙했지만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 한 사람을 나락에 빠트리려는 노력을 수개월 동안 한 저는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피폐해졌어요. 분노는 저에게 목표를 줬어요. 마치 세상에 다른 목표는 없는 듯이. 영어를 못해서 눈치만 보던 저를 활발한 성격으로 만들어줬고, 아마 지금까지 저를 괴롭히는 불면증은 그때 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분노는, 그때는 기독교인이 아니였으니, 분명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못보게 했고 나 자신을 돌보지 않게 만들었어요.
10.10.2018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우리는 여태까지 타인의 정죄에 관하여 비판해왔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정죄에 대해선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남을 판단한 적이 있는지 깊게 생각해봅시다.
사람을 관찰을 자주 하는 저는 타인의 판단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 자체가 판단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관찰 후 어떤 사람은 이런 타입이니까 이렇게 행동할거야 라고 생각 하는 것도 분명 판단인 것이, 그 사람이 안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사람이 미리 그 행동할 것을 예측하고 피하거나 좋지 못하게 대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예측한 그대로 결국 행동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틀릴 가능성이 있다면 적어도 그 가능성 만큼은 타인을 믿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판단을 미리 내버리는 이유는 내가 받을 수도 있는 상처를 미리 예측하고 피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식의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지만, 그 가운데 분명 특정 부분 정죄는 있는 것 같아요.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의 "죄성"은 그 모습만 바뀔 뿐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을 반대하려는 그 본질말이에요. 즉 내가 나를 정죄한다면 그것은 특정 행동의 정죄가 아닌 그 본질, "인간"이고 아직 예수님이 되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그 모든 부분을 정죄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직 되지 못한 "나" 역시 나의 정죄에 들어가게 되는거죠.
06.21.2019
설교 1
빌립보서 4 10 14
비.교.
첫번째 설교는 생각했던 대로 정체성에 대해서. 심리학에서는 나름 자주 들어본 토픽이다. 내가 무엇에 가치를 매기는가에 따라서 나 자신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말을 한 학기에도 몇 번씩 듣는 나로써는 첫 설교 치고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설교였다. 다만 심리학에서는 대체적으로 비교를 그만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되려 어렸을 때 부터 비교를 함에 그 비교가 인간의 발전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고 어른, 혹은 나 보다 잘난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여 살아남는 것을 살아남았기에 옳은 것이라고, 혹은 유리한 것이라고 보는 교수님들도 존재하곤 한다. 끊임없는 우월감과 열등감의 밀당 속에서만 자신이 더 강해지고 높아 질 수 있다고, 포기 직전 까지의 비교는 그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조금 다르게 말씀하셨다. 비교는 비참해지거나 교만해 지거나,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초래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는 곧 열등감과 우월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적 우월감은 그냥 좀 재수없음에서 그치지만 열등감은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든다고 하셨다.
이는 나의 현재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근 1년, 나는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도와 성경읽기는 뒤로 제쳐두고, 한다고 마음먹었던 묵상 조차 손을 놔 버렸다. 굳건하던 믿음은 하나 둘 벗겨져 나가 손을 놓고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였고,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아이들"이라는 매개체로 포기는 하지 말라며 달래시곤 하셨다.
나의 신앙적 열등감은 "나보다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며, 나보다 예수님과 가깝지 못한 사람은 없다"라는 굳건한 믿음에서 나온다. 이 신앙적 열등감은 나의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듯 싶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은 나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다가오게 된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고정관념, 색안경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면 소위 "좋은", 혹은 "나보다 나은" 기독교인들을 보았을 때 답답함과 억울함이 샘솟게 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함에 원망하고 다가오지 않음에 답답해하며 일하지 않음에 억울해 한다. 이는 곧 서로 다른 두 비교행위, 즉 자존감과 신앙적 비교가 마치 양쪽에 세워진 거울처럼 서로 핑퐁을 해대며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무렵 목사님은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배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집, 고정관념들을 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고집, 나의 고정관념 중 무너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는 질문 이였다.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마다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너는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자주 하는 듯 했다. 참 신비로운 타이밍에 신비로운 이유로 그들은 내가 나를 쓰레기로,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마치 안다는 듯이 안쓰럽다면 안쓰러운 눈빛으로 답답하면 답답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한없이 당당하던 아이가 순식간에 움츠려드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이상했을까.
깨져야 할 고정관념은 신앙생활에 우위가 존재한다는 것. 각자의 신앙은 그저 각자 개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일 뿐인데 저 사람이 나에게, 내가 그들에게 왈가왈부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울은 일체의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첫번째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는 에로사항이 아직 많음으로 보류.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신의 부재 등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음으로, 그리고 잘못된 관점에서 바라보기엔 차라리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할 것이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바로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바울은 비교하지 않고 현재 삶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사실 내 지금 삶에 만족하긴 한다. 옛날에 비하면 나는 뭐 거의 천국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래도 행복을, 희망을 갈구하는 것을 보면 아직 일체의 비결에 다다르지는 못한 듯 하며, 그렇기에 더 많은 고통과 답답함을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세번째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 인생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이슬이니 순간을 사랑하면, 순간만 보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시간이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