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은 인도를 갈 때 늘 경유하던 곳이라 언제나 여행지 선택에서 배제하곤 했다.
15년 전, 첫 방콕 여행을 기점으로 방콕은 스탑오버 할 때마다 들렸고 둘째를 임신하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새로울 건 없지만, 두 아이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으니 이번에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국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후아힌 3박, 방콕 2박 숙소를 예약했다.
우리 가족은 후아힌에서 3박을 보내고 미리 예약해 둔 cab을 타고 3시간 넘게 달려 방콕 샹그릴라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하고 마지막 만찬을 즐긴 후, 남편은 홀로 공항으로 가서 인도로 돌아가고 우린 방콕에 남았다.
남편이 있는 동안 우리의 보호자가 남편이었다면 남편과 이별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우리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놀면 안 되냐는 아이들에게 오전 시간은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징징대지 않고 잘 다녀오면 게임 1시간과 오후 수영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왕궁"은 이번에 가면 세 번째니깐, 굳이 갈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에게 태국을 대표하는 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샹그릴라 호텔에서 사톤 선착장까지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이다. 둘째는 긴바지로 갈아입히고, 첫째도 롱원피스로 갈아입히고, 나는 민소매 원피스라 얇은 카디건을 챙겼다. 복장 규정이 있고, 규정에 맞지 않는 사람은 왕궁에서 옷을 사 입으면 된다.
사톤 선착장에서 블루 티켓(1인당 30밧)을 사니, 에어컨이 있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오렌지 티켓은 1인당 8밧이다.) 왓아룬을 지나고 좀 더 가면 타창이 나온다. 타창 선착장에 내려서 왕궁 방향으로 걷는데, 보행자가 길을 건너는 구간에서 한 친절한 태국인이 손수 나서서 차를 막으며 외국인들이 안전하게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
그의 친절이 고마워서 웃으며 땡큐라고 했더니, 길을 건넌 후 내게 말을 걸었다.
내 어깨를 가리키며 그렇게 입고 가면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카디건을 보여줬다.
-티켓은?
-티켓 어디 파는데?
-저기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었다.
-할 줄 알아.
-오후에 문 열어.
-뭐라고?
-왕궁 오전에 문 안 열어. 오늘 종교적인 이유로 태국 사람만 들어가고 외국인은 오후 1시부터 들어갈 수 있어.
-뭐라고? 우린 지금 못 들어간다고?
-뭐 타고 여기에 왔어?
-배 타고 왔는데.
갑자기 그가 말이 확 줄었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배를 타고 왔냐고 물은 것 같다.
내가 배 타고 왔다고 말한 이후로 그는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애 둘을 데리고 외국인이 향하는 길로 돌아섰다. 그리고 문 쪽에서 밖으로 나오는 외국인을 본 순간, 그들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얀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직원인 듯한 사람에게 입구를 물어봤더니, 쭉 걸어가라고 했다. 왕궁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 복장 체크를 받고, 보안검색대를 지나 티켓을 구입하고 들어가면 된다.
돌아오는 길에 '방콕 왕궁 사기'를 검색해 봤다. 나한테 썼던 수법 그대로였다. 이 사기를 당한 사람은 1인당 1000~1500밧(대략 한화로 4~6만원)을 내고 허름한 배를 타고 2시간 동안 강에서 헤매다가 지쳐서 내렸다고 한다.
만약 사기꾼에게 당했다면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낭비할 뻔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아이들에게 이 일을 설명해 줬더니 모두 안도하는 눈치다.
우리는 호텔로 걸어오다가 식당가에 들러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포장했다.
시원한 방 안에서 오늘 사기를 당하지 않은 일을 생각하며 환희에 빠져 있다.
만약 배가 아니라 툭툭이를 타고 왕궁에 갔더라면 나도 그 사기에 당했을까?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우선 보트 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바로 거절했을 것 같다. 그래도 왕궁에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황스럽긴 했다.
델리 공항에서 내리면 사기꾼 천지라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엄청 들었는데, 방콕에서도 이러다니...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한 번, 두 번 생각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면 꼭 의심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