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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은율 Feb 01. 2024

할머니의 삼계탕

-같은 성씨를 가졌으니 자넨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처음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실행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3회 차인데, 이런 생각이 몰려온다.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꼭 여기에 써야만 할까?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70% 이상이 된다. 하지만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 이미 소멸한 지 오래된 분을 불러 모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내 등 뒤에 말없이 앉아 계신다. 다 잘 될 거라고 다독여주신다.





-할머니 나 늦었어요, 먼저 나가요!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버스정류장에서 서 있는데, 버스보다 할머니가 먼저 나오셨다. 우리는 만원 버스에 함께 올랐다. 할머니는 나의 목적지 절반쯤인 기차역에 내리셨는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내리시느라 나와 인사의 말을 오래 나눌 정신도 없었다. 할머니가 짊어지고 있던 보따리 가방만 눈에 계속 들어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교로 일하고, 저녁 먹고 교육대학원 수업을 듣던 시절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늦게까지 과제 준비하고 또 자고 일어나 일하러 갔다. 할머니는 내가 있는 집에 자주 오셔서 간섭 아닌 간섭을 하고 가곤 했는데, 나는 가끔 멍하게 할머니가 홀로 떠드는 모습을 듣고만 있다가 방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할머니, 저 너무 피곤해요. 들어갈게요.


할머니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작은 아빠, 삼촌들 집 세 군데를 다 돌고 와서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가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면 나는 항상 할머니가 아닌 다른 이의 편을 들곤 했다. 나의 할머니이기도 했지만, 숙모들의 시어머니이기도 했기에, 나는 항상 중간 입장을 지키고자 했다. 사실은 그것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는 거 자체가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나의 생활을 감시하듯 들여다보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내 얘기를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불만을 가졌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그만하기로 하고 학원가에서 일할 때까지도 할머니에게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나 자신과 불화한 사람이 이 세상 누구와 다정할 수 있을까.


시골집에 모인 명절날 밤이었다.


-아빠, 저 유럽 여행 두 달 다녀올게요.


아빠는 내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나는 나대로 또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다. 그 모습을 바라본 할머니는 우리 부녀 사이를 중재해 주셨다.


할머니는 아빠를 붙잡고, 손녀 속이 말이 아닐 거라며, 왜 안 그렇겠냐며, 다독여야지 자꾸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거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 쓰고 싶다고 한 애가 글 쓰는 걸 포기하고 교사가 된다고 했는데 그것도 포기했고, 결혼할 거라고 오래 만난 남자친구도 소개해줬는데 결혼도 반대했으니,  애가 어디에 마음을 붙이겠니.


할머니는 그날 밤 내 등을 토닥이면서 괜찮다고 하셨다.


괜찮을 거라 하셨다.


세상에 별 사람 없다고, 서로 좋으면 된 거라고.


아빠가 마음을 바꾸고, 결혼 승낙을 하셨을 때, 할머니는 남자친구를 집에 부르셨다.


그리고 직접 삼계탕을 끓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손주사위가 나랑 성이 같은 거 보면, 손주사위는 분명 어질고 좋은 사람일 거야!


난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성 씨 같은 거랑 사람 좋은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나는 할머니가 남편에게 삼계탕을 끓여준 게 오래도록 기억이 난다. 그건 나의 선택을 인정해 준 할머니의 첫 번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나 결혼은 하지만 애는 절대 안 낳을 거예요!

-결혼하면 아이는 당연히 낳아야지, 무슨 소리야.

-애 낳으면 제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전 제 삶을 애한테 희생하고 싶지 않아요!

-치사랑은 없어도 내리사랑은 있는 법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 주신 사랑과 마음의 절반도 돌려드리지 못했다.


나는 '이기적'인  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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