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과 여성주의, 폭력과 명랑성, 뒷면같은 모순과 에워싼 사랑
엄마를 닮은 동료였다.
그녀는 베지테리언 샌드위치를 만들 때마다 손에 묻는 버터 냄새를 잔인하게 느꼈다. 우유를 짜내고 고기를 도축해 소비하는 과정이 사회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이 감각에 익숙해진 사회는 저 감각에도 익숙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말이었지만 세상의 다수가 귀기울여듣기엔 모세혈관처럼 섬세한 감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슬프고 화나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은 스스로가 뼈와 피부로 느끼는 것이라 도무지가 타협할 수 없고 멈춰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난 그걸 엄마의 생을 지켜보며 배웠고, 그런 감각을 공유하는 시대는 조금은-혹은 아주 많이 지각하더라도 반드시 온다는 것 또한 목격했다. 한번 목격하는 일이란 영영 믿게되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 난 그녀의 방향성에 증인이 되어주고 싶었다.
명랑한 그녀는 베를린이 시위하기에 아주 좋은 도시라고 웃었다. (사람은 명랑해야 폭력과 싸울 수 있는게 아닐까ㅡ엄마와 동료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온 나라에선 그런 목소리를 죽이기위해 여전히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여전히, 죽인다.
모국과 타국의 틈새엔 언제나 시차가 있다. 그건 시곗바늘이 지나치는 숫자에 관한 것만이 아니란 것을. 역사라느니 사회라느니 하는 거대한 단어를 억지처럼 끌고와야만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는 속도차가 있다는 것을. 이런 것들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자각한다.
여성운동가인 엄마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가지게 된 것들. 내가 나고 자라 오랫동안 떠나고 싶었던 고향같은 감각. 그러나 돌아올 수 밖에는 없었던. 나의 모국어같은 폭력과 저항.
이야기를 마치고 뒤돌아선 그녀가,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손님에게 고추장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스리라차 마요네즈 샌드위치 라고 설명하는걸 지켜보았다. 스리라차는 고추장보다 유명하니까. 고추장은 발음으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베를린의 한가운데에서 이야기하기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래도 고추장은 한국이잖아. 너의 한국인 동료가 여기에 서있잖아. 스리라차는. 베를린에서 전시중인 어떤 태국계 예술가는 미국식 스리라차의 식민성에 대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굳이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나 다각도로 조각된다는 사실에 혼자 비밀처럼 웃었다. 그런 목소리도 있는거다. 그럼에도 내야하는 목소리도 있는거다. 탓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모든 세상을 자각할 수 없으니 자신을 에워싼 사방의 한 단면씩만을 구해내도 대단한 일이다.
제 스스로조차 한평생을 걸쳐 간신히 구해낼 수 있는데. 온 세상을 구하라는건 유독하고 지독한 말이다.
그러니 고추장을 스리라차라 말한다해도 난 여전히 그녀의 눈에서 엄마를 본다. 그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