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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Nov 24. 2019

뜯지 않은 칫솔 세트를 뜯기 위한 인생 정리 1.

중앙광장 지하의 대학원 논작실에 가지 않은 지 2달이 다 되어 간다. 1학기 때에는 그곳에서 밤을 새기도 여러 차례였는데, 이번 학기는 짐 가지러 고작 몇 차례 잠깐 들른 것이 전부다.

 "책상에 뜯지도 않은 칫솔세트만 덩그라니 있어요." 논작실 자리를 재배정 받으며 칫솔도 새로 샀는데, 그걸 여태 뜯지 않았다.  어린 동료들은 내가 주저 앉을까 항상 염려하며 애정 어린 관심을 보낸다.

 

2002년 7월, 월드컵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넣던 날 국문과에서 석사학위 심사를 받았다. 지금은 교수가 된, 후배 김지혜와 함께 그날 밤 쓸쓸히 어느 술집에서 월드컵을 봤다. 즐겁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논문을 써서 너무 부끄러웠다. 이 쓰레기를 바탕으로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은 치욕이라, 공부를 그만 두려고 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대학원 생활이 행복해서 쉽게 그만두기도 어려웠다. 우러러 볼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고, 그분에게 너는 책가방만 메고 학교 다니면 그게 공부라고 생각하냐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205번 버스 안에서 펑펑 울기도 했지만,  꼿꼿한 결기와 학문의 엄정함, 깊은 통찰과 넉넉한 학문적 포용력을 보면서 나도 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수련을 거치에 2002년의 나는 너무 어리고 약했다. 지금은 교수가 된 백소연, 김지혜, 이지영, 허순우, 한혜원, 소설가 조해진, 지금 연락이 끊긴 심은경, 조영실과 함께 공부했던 20대 중반의 우리에게 우울하지만 열정적인 지적 에너지가 넘쳐 흘렀었다. 신촌 밤거리를 걸어다니며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밤들이, 늦은 밤까지 발표하고 혼나고, 또 쓰고 혼나고, 말하고 또 혼나던 인문관에서의 날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난한 인텔리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형제들은 알게 모르게 학문하는 삶을 동경하며 그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남동생의 부인이 직장을 그만 두고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가난한 시부모인 우리 아버지는 노령연금을 모아 한 학기 학비를 마련해 주었고, 시어머니인 엄마 또한 심정적으로 최대한 지지를 해주는 거처럼 내게는 보였다. 그녀가 학위를 마치자 다시 남동생이 휴직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부인만큼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아닐 뿐 아니라 학문에 대한 열의가 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영대학원을 마치고는 다시 본업에 복귀했다.  나 역시 선생이 되고 난 이후에도 읽고, 쓰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퇴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각종 모임에 다녔다.  철학아카데미에서부터 대안연구공동체, 심지어 한겨레문화센터까지. 그 중에서도 대안연에서 만난 시 쓰는 희음 씨와 함께 했던 책읽기 모임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삶의 궤도가 너무 다른 4명이 3년 가까운 시간, 자발적으로 함께 책을 읽었다. 우리는 김수영 시와 산문, 이상의 모든 작품을 우리의 힘으로 함께 읽었다. 권영민, 김윤식, 신형철, 함돈균, 조해옥 선생의 논문들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상의 모든 작품을 1년에 걸쳐 읽었다. 미술 학원 원장, 갓 등단한 시인, 비정규직 청년, 그리고 국어 선생인 나. 푸코와 각종 페미니즘 서적도 읽으며, 행복한 일요일 아침을 만들어나갔는데, 나의 이탈로 이 모임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희음 씨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미술 전공자인 병선 씨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읽기'라는 프로젝트를 여전히 이끌어 가고 있다.


열심히 읽었지만, 그 시간들을 보여줄 성과물이 우리 손에는 없다.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지 못한 채 증발되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소통시킬 언어와 기술이 없었다. 그걸 갖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권 안에서 이론을 바탕으로 정제된 글을 쓰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전공은 국문학, 그것도 고전시가. 그런데 고등학교 선생으로 살다보니 이것보다는 이 아이들에게 근본적으로 읽고 쓰는 행위가 무엇이며, 남고생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가 나에게는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다. 국문과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아, 마침 우리 학교에서 새로 갖춘 학술검색서비스로 논문 몇 개를 찾아 읽다가 지금의 지도 교수님을 알게되었다. 그녀에게 나의 이력을 담은 메일을 보냈다. 바로 다음날 메일이 아니라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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