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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Feb 13. 2020

가난한 귤, 따뜻한 귤, 낭만적인 귤,

 - 21살 청년에서 귤이 생일선물로 왔다

귤을 받았다.  

밤 10시 43분, "참 맛있는 제주를 선물합니다"는 문구와 함께 제주 감귤 2.5Kg이 카카오톡 선물로 왔다. 커피 쿠폰이나 케이크 교환권은 받아봤지만, 노란 박스 위로 한 무더기 쌓여있는 귤이, 이미지로, 선물로, 날아올 것이라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도 21살의 청년에게서. 생일선물로. 빵 터졌다.  귤, 귤이라니,


나는 귤을 사랑한다.  귤은 '나의 소울 푸드'다.



대 여섯 살쯤이었을까, 가난의 형상은 도시에서 불어왔다. 큰 맘먹고 엄마와 버스를 타고 영주로 장구경을 갔다. 추운 겨울이었고, 내가 살던 춘양의 오일장과는 달리 좁게 늘어선 골목 양측으로 다닥다닥 가게들이 붙어 있고, 그 작은 가게들은 물건들로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주렁주렁 달린 달린 물건들이 부닺히며 바람에 문풍지가 떨리는 소리보다 날카롭고 강렬한 소리를 냈다.   몸이 보이지 않는 아줌마가 성할 데 없이 흠집이 난 나무 원통 위에서 얼어붙은  동태 대가리를 내리쳤다.  육체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드러날까  털 스웨터에 솜이 두둑이 들어간 둔탁한 바지, 몇 겹으로 둘러싼 머릿수건이 달아나는 몸을 옥죄고 있었다. 슬펐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몸이 없어질까 봐. 가난은 몸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장충당 약국 앞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애기 엄마, 이것 좀 사 줘. 라고 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엄마 손에 잡힌 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졌다. 신호가 바뀌었고, 엄마 손에 이끌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에도 나는 그 할머니를 뒤돌아 바라보았다. 귤 한가운데 파묻혀 얼굴만 동동 허공에 뜬 할머니. 몸이 없다. 파란 비닐 장판 위에 귤을 늘어놓고, 그 안에 앉아 있는 귤 장수 할머니에게는 어린애 손을 잡은 젊은 새댁에게 귤을 사달라고 애원하는 얼굴만이 있었다.


동생과 회기동 반지하방에서 십 년을 살았다. 회기동사무소가 초입에 있는 100여 미터 남짓한 골목에는 나물 파는 노점,  생선가게, 쌀집, 과일가게, 그릇가게, 슈퍼마켓, 김밥집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정월 대보름 즈음에는 그 골목을 막고 상인들이 윷을 놀았다. 그 누구도 시끄럽다거나 통행에 불편을 준다고 민원을 넣지 않았다. 정월 대보름이니 윷을 놀고, 윷을 놀 넓은 공간이 골목밖에 없으니까 그 골목에서 골목 텃주대감들이 윷을 노는 것은 당연했고, 나같은 뜨내기는 윷판 뒤로 걸어서 집에 가면 됐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 골목 과일가게는 내 또래의 남매를 둔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제 값으로 치르는 것 같은데도 항상 아줌마는 학생이니까 덤으로 몇 개 더 준다고 했다.   '6.25가 나기 전 제재소를 하던 ' 동네 유지의 집에 세들어 사는 '착한 대학생 남매' 중 '누나'에 해당했기 때문에, 나는 '김종수 씨네 학생'이라고 하면서 외상도 할 수도 있었다.  과외비를 타는 날이면 오천 원어치 귤을 샀고, 그렇지 않더라도 겨울이 되면 거의 매일  천 원어치 귤이 담긴 까만 비닐 봉지를 흔들며 계단 5개를 내려갔다. 잠기지 않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귤을 까먹으며  KMTV나 M.Net를 봤고, 동생은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비닐 봉지 안에 귤은  넉넉했고, 외상으로 귤 천 원어치를 주는 골목은 가까워, 나의 반지하방은 가난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김종수 씨네 반지하방은 기생충의 반지방과 거의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을 드나들던 많은 이들이 우리집으로 들어오긴 직전에 마주치는 그 과일 가게에서 귤을 많이도 사들고 왔다.


귤 하니, 줄줄이 사탕처럼 또 생각이 난다. 당연히 겨울이었다. 신촌에 '향음악사'라는 데가 있었다. '향음악사' 건너편에는  리어카에서 귤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던 나는 그날도 수업을 빠졌다. 시간은 남고,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었다. 향음악사에서 조금 올라가면 코끼리 호프가 있었는데, 그 코끼리 3층인가 4층에 내 절친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향음악사 맞은편 리어카에서 귤을 사서 코끼리 호프 3층인가 4층인가를 올라가 주인 없는 방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그 하숙방에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 다시 3층인가 4층인가를 걸어 내려왔다. 영화처럼 진눈깨비가 내렸다. 향음악사에서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나왔다. 그때 MBC '베스트극장'에서 안경을 쓴 여주인공이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르며 끝나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베스트극장'을 챙겨보던 나는 그 드라마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듣고는 큰 감동을 받아 내 인생의 노래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이방인'을 내 인생의 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에 들떠 나온 이때, 때마침 길거리에서 인생의 노래를 들으니, 내 삶이 마치 영화같다는 착각을 하며 눈 오는 향음악사 앞에 서 있었다.


다시 귤,

나는 작은 귤을 좋아한다. 하나 까서 나눠먹는 귤 말고, 까서 혼자 다 먹는 귤. 추위와 함께 오지만 추위와 어울리지 않게 주황색으로 빛나는 귤, 가난한 귤, 따뜻한 귤, 낭만적인 귤, 감동적인 귤, 자족적인 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다시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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