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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Oct 08. 2019

나의 아름다운 주차장



  달이 밝았다. 북한산 뾰족한 봉우리 반 뼘 위 두둥실 달이 밝았다. 그대로 차를 몰아 언덕길을 올랐다. 북한산 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그곳에는 우리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주차장이 있다. 달이 두둥실 밝은 그 날, 북한산국립공원 관리 차량만이 그 빛을 받고 있었다. 커다란 트럭 옆에 사이좋게 자그마한 내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창을 내렸다. 아직은 날이 싸늘했다. 심드렁하게 ‘한 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지’겠다는 노래를 들으며 휘영청 달을 등지고 꽃이 되기 위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넘을 수 없는 담을 넘는 자객을 생각했다.


 후두둑 검은 구름이 몰려올 때에도, 개구리 첫울음이 들릴 때에도, 남국의 뜨거운 바람이 칭칭 감기는 밤에도 그곳에 있었다. 십 분, 때론 한 시간, 내가 쏟아낸 말들이 흘러갔을 곳을 생각한다, 2002년 콘야의 버스 정류장에 불던 바람을 생각한다. 알래스카에서 딸기잼을 모우는 여자를 생각한다. 봄의 참혹을 노래한 시인을 생각한다. 그리고 너를, 당신을, 나를 생각한다. 닿지 않을 내일과 오지 않았을 어제를 생각한다. 출렁거리며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천년의 강을 생각한다. 새로운 눈이 뜨이고, 둔탁한 피부 아래 숨죽이고 있던 오래 전의 더듬이가 나온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심호흡을 하고 둔탁한 현관문을 열고, 자객과 아나톨리아 평원을 훑고 온 바람은 들어올 수 없는 아름다운 나의 집, 나의 학교로 돌어간다.


 아름다운 나의 집과 나의 학교를 사랑한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을 때에도 작고 연약한 아이를 꼭 껴안고 있으면 지친 몸을 뉘일 따뜻한 집이 있음에, 그리고 너에게서 기막히게 펄떡이는 가능성이 볼 때면 너를 만날 수 있음에, 그렇게 나의 집과 나의 학교가 주어졌음이 눈물나게 고마울 때가 있다. 그래도 가끔 교사라는 이름이, 엄마라는 이름이 버거울 때가 되면 북한산을 등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만의 헤테로토피아를 만든다. 아나톨리아 평원의 바람과 검은 두건 아래 눈빛만은 형형한 자객이 함께 노니는 곳. 시간이 뒤엉키고 꿈과 욕망이 출렁이는 나의 아름다운 주차장.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주차장’,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어린 시절 돌계단 아래 쏙 들어가 여러 가닥으로 펼쳐진 시간을 생각하면, 동네 아이들의 번잡한 소리도, 나를 찾는 엄마의 외침도 딴 세상에서 공명했다.  엄마의 야단도 아빠의 고함도 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견디고 또 견딜 수 있었다. 이십 대에는 학교 앞 단골 비디오방이 그러했고, 지금은 나의 아름다운 주차장이 그러하다. 누군가에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하교 버스 안이, 누군가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이, 누군가에게는 집 앞 공원이 그러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지금 이곳의 문법에서 빗겨난 그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를 다시 생각한다.


 만나보지 못한 나와 너를, 당신이 함께 머무는 나의 아름다운 주차장,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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