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애는 운동권이었다. 싸워야 할 대상이 슬라임처럼 끈적끈적 온 몸에 붙어 있어 선배들이 하던 것처럼 화염병을 들거나 팔뚝질을 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슬펐을 학생 운동권, 그러나 섬세하고 예민하여 끈적끈적한 슬라임을 몸에 붙이고 얌전히 앉아 있을 수는 더더욱 없어 고달팠을 운동권. 총학생회실에 가득찼던 담배 연기와 페인트 냄새, 낯선 웃음과 결기에 찬 말들이 어색했던 그애는, 운동권이었다. 나는 그애의 같은 과, 같은 동아리의 동갑내기 선배였을 뿐, 슬프고 고달픈 운동권 대학생의 삶을 나눌 동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애랑 경주 남산도 오르고, 쌍계사와 화엄사도 가고, 보길도도 가고, 송광사, 선암사도 갔다. 선운사는 여러 번. 선운사 도솔암, 낙산사 도솔암, 우리는 또 어디를 더 갔던가. 광주고속버스터미날 건너편 비디오방, 순천의 관광모텔, 불국사 앞 여관, 쌍계사 초입의 여관, 보길도의 민박집, 또 어디에 누워 잠을 잤던가. 총학생회 임기를 끝으로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그애는 어떤 IT 컨텐츠 회사에 들어가서는 시니컬한 독설이 가득찬 글들을 썼다. 운동권 대학생으로 살면서 갈고 닦은 논리와 말발, 글발로 연애, 섹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가끔 라디오에 나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던 회사에서 조금은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회사로, 그 다음은 유명한 회사로, 그 다음은 또 다시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외국 회사로 이직에 이직을 거듭하는 와중에 그애는 나와 같이 버스를 타고 1박 2일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고건축이나 사찰미술에 대한 조예는커녕 사천왕과 일주문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가 심야버스를 타고 전국의 절들을 찾아 돌아다닌 것은, 그냥 그곳이 조용하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사찰도 '제때'가 아닌 때에는 찾는 이가 드물었고, 20대 중반의 청년들은 더더욱 그런 곳을 찾지 않을 때였으니, 우리가 머문 곳은 항상 우리뿐이거나, 우리와는 무관한 삶의 방향을 가는 이들뿐이었다. 특별히 무엇을 한 기억도, 특별히 멋진 풍경을 본 것도, 특별히 기막힌 인연을 만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히 운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절 밑의 허름한 여관에 누워 파리똥 묻은 전구알을 쳐다보았다.
쌍계사 벚꽃이 아름답다 하여, 벚꽃이 만개하면 사람이 많아질 것아 벚꽃이 만개하기 전 쌍계사를 서둘러 찾아가기로 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진주, 허수경의 고향이다. 그녀가 경상대를 나왔다고 하여 그애를 꼬셔 경상대 학생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다. 그애는 내내, 진주 최고의 맛집이 경상대 학생식당이냐며 투덜댔지만, 촉석루에 가서 논개의 기개를 기리는 것보다는 라면을 먹는 것이 낫겠다며 나와 같이 한때 허수경이 거닐었을 경상대에서 라면을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진주 터미널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하동에 내려, 쌍계사행 버스로 갈아탔다. 가는 길이 내내 아름다웠다. 아직 바람 끝이 찬 날이었지만, 완행 버스 뒷좌석 창으로 들어온 봄볕은 따뜻했다. 그 따스함에 기대어 우리는 한 나절을 노곤히 보냈다. 쌍계사에 닿았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어 우리가 본 것은 어둠에 잠겨가는 탑뿐이었다. 벚꽃은 없었다. 없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쌍계사에서 입을 환하게 벌린 꽃들은 못 보더라도, 뭔가 아득한 봄 저녁의 운취는 우리에게도 있을 줄 알았는데, 급습한 산사의 어둠은 그저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어둠에 쫓겨 내려온 우리는 쌍계사 입구의 수십 년 된 듯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 집에서 잠을 잤다. 30-40명이 잘 수 있는 운동장만한 크기의 방에는 냄새나는 이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20대 중반의 그애와 나, 단둘이서 잠을 잤다.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짝은 너무 허술하고, 그 방의 오랜 세월이 쌓아놓은 오묘한 냄새가 몸을 근지럽혔지만, 그래도 그 방에서 밤을 무사히 보내고, 아침 일찍 화엄사를 향해 우리는 떠났다.
쌍계사에 갔었지만, 쌍계사도, 벚꽃도 보지 못한 우리의 봄마실.
못 볼 줄 알았면서도 찾아 갔고, 볼 수 있을 때를 알면서도 일부러 놓친 우리의 봄마실.
20대, 우리의 봄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