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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Jan 06. 2021

무심한 배려와 사소한 잔소리가 필요한 때

수시 추가 합격 발표도 끝이 났다. 교무실 한 켠에서는 수시 불합 여부 자료를 정리하고 또 한 켠에서는 수시로 갈 대학을 정하지 못한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정시 원서 상담을 한다. 생기부, 꿈, 희망사항, 온갖 것들을 들춰보면서 여기 쓸까, 저기 쓸까 고민하는 수시 상담과 달리 정시 상담에는 들춰 볼 것도, 나눌 이야기도 없다. 능력자 선생님께서 여러 입시 기관 자료를 종합해서 만들어 놓은 우리 학교 자체 프로그램을 메신저로 담임들에게 쫙 뿌리면, 그 액셀 파일을 학생과 같이 들여다보면서 점수에 맞는 학교와 과만 찾으면 된다. 가고 싶은 과? 그런 건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표준점수의 합,  과목별 반영비율과 영어 반영 방법, 각 입시기관 자료에서 보여주는 합격의 칸 수뿐이다.

 

정시 상담을 하러 오는 아이들의 등은 오그라들어 있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행여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두려운지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눈빛은 흐리다. 꽤 오래 자지 않았거나 반대로 꽤 오래 잠만 잤을 것이다. 알은체하기도 멋쩍다. 수시 전형에서의 실패, 흔히 말하는 '6 광탈'의 참혹함과 입시가 끝난 이후의 폐인 생활이 그를 오그라들게 했을 것이다. 며칠 만에 처음 신발 신고 밖에 나와보는 거라는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어디든 갈 거다, 어디든 갈 거니까 일단 세수도 잘하고, 면도도 잘하고, 게임만 하지 말고,  블라블라 블라, 재수를 하든 붙는 데 가든 그건 그때 생각하고 지금은 제때 일어나서 밥 먹고 블라블라....' 할 수 있는 것은 잔소리뿐이다.  잔소리는 할 말이 없을 때 습관처럼 나오는 인사와도 같은 것이다. 좀 긴 인사. 그런데 습관 같은 인사가 꼭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올해 나는 3학년 담임도 아닌데, 북한산 뷰가 끝내주는 아늑한 3학년부 교무실에 있었다. 3대가 복을 쌓아야 내려주신다는 '3학년 비담임 교과  전담'이라는, 어마어마한 행운에다가 뷰 하나만큼은 전국 제일 명당일 교무실 자리를 덤으로 얻은 것은 내 몫의 일을 나누어진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속도 없이 너불너불 헤헤거리며' 다니는 탓에 나도, 주변 사람들도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그 참사는 내 인생에 날카로운 절단면을 남겼다.  아픈지도 모르고 6개월이 흘렀고, 수업 도중 첫 쇼크가 왔다.  그 후로 동료들은 가족들보다 더, 세심하게 내 짐을 나누어서 졌다. 아침마다 아이들 깨우는 전화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가한 자리에서, 가장 여유롭게 학교 생활을 하는 나를 배 아픈 눈으로 흘겨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업무도 없이 그 '명당' 자리에서 한량 생활하는 거 아니냐고 비꼬았을 수도 있을 텐데, (뒤에서 뭐라고 했든 간에)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이런 무심하면서도 묵직한 배려 덕분에 2020년을 지나왔다.



그런데 다시 겨울이 왔고,  '그 날들'과 비슷한 온도의 바람이 불고, 그 지난 핑곗거리에 나를 던져 모든 일상에서 턱, 손을 내려놓고 싶어 졌다.  잠 못 잔 쾡한 눈은 바닥을 향하고, 누가 나를 볼까 등은 새우처럼 오그라들고, 걸음은 쓸데없이 빨라지고, 상한 머리는 부스스 미친년 널뛰듯 흐트러지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또 자는 동굴 같은 날들이 며칠 이어졌다. '어디든 갈 거니까 세수도 잘하고, 면도도 잘하고, 게임만 하지 말고 블라블라' 이 잔소리는 그 아이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잘 살아갈 거니까, 일단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세수도 하고' 밖에 나가 찬 공기도 잔뜩 마시면서 걸으라고. 이 소리가 필요한 때에, 딱, 귀신같이 동료들이 학교에서 같이 점심이라도 먹자고 연락을 했다. 며칠 만에 외출복을 입었다.  


'오그라든 ' 모른 척해주는 무심하고 묵직한 배려와  씻고 걷고, 먹으라는 따뜻하고 사소한 잔소리는 나와 정시 원서를 쓰는 3학년 아이들이 지나는 어둡고 쓸쓸한 골목을 비추는 랜턴과 다. 고마워 잠이 오지 않지만, 이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기지개를 쫘악, 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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