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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Jun 14. 2021

꼬막의 토

말을 하면 할수록 가닿지 않는 말들이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입을 벌릴 수조차 없는 기막힌 상황들이 불가항력적으로 날아든다. 이를테면, 스티로폼 박스를 열었더니 검은 모래가 잔뜩 묻은  한 무더기의 꼬막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전화기 너머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보성에 갔더니, 어메, 그렇게 싱싱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네 생각이 났다고. 이걸 바로 해먹으면 우리 새끼들이랑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다고.

살아있는 것들이닝께, 받자마자 바로 해감하라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내 생각이 왜 났을까? 나의 무엇이 생각났을까? 내가 할 일? 해야만 하는 일?  나는 해산물도, 고기도, 요리도 좋아하지 않는다. 더더욱 극렬하게 좋아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중이었다.  7시 4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저녁 먹고 해야할 게 많은데, 과제도 하고, 책도 좀 읽고, 음악도 좀 들어야 하는데, 내가 정한 그 '해야할 일'에 꼬막 해감은 없었는데. 죽은 바다 생물들의 시체를 잔뜩 묻힌 꼬막이 난데없이 내 앞에 있다. 꼬막 앞에서 으앙, 울고 싶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곱디고운 모래가 하염없이 나왔다. 쏟아내고 쏟아내도 꼬막은 그저 천진하게 토하고 또 토했다. 스르륵,  언제 어디서 나왔지 알 수 없는 고운 모래들이 음흉하게 날 비웃었다. 그날 새벽 3시, 검은 꼬막이 또해 낸 고운 모래가 내 입 속 가득 차올라 나는 죽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 꼬막을 보낸 '그녀도 위대하다'

그녀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인 한국 현대사를 직통으로 맞은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한국 전쟁,  신군부의 광주도륙, 어느 것 하나 그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혼돈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가 없었다면,  영하 20도의 날씨에 그녀의 손자 손녀들이 새빨간 딸기를 먹으며 그녀와 전화통화를 하는 안락함을 누릴 수는 없었을 테다.  그녀는 자애롭고 선하다. 설날 아침이면 근무 서는 경비를 거실로 들여 소고기 고명 듬뿍 올라간 떡국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을 잊지 않는 그녀는. 다리 다쳐 병원에 입원한 먼 친척을 위해 양념 듬뿍 들어간 김치를 손수 담가 병원을 찾는다. 그게 사람 사는 도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런 그녀가 꼬막을 보고 내 생각을 하고, 새해가 되면 건강을 챙기라는 살뜰한 걱정을 한다.  나는 그녀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의 몸은 이제 너의 몸이 아니라고. 가족의 몸이라고. 역시나 나는 그녀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도 그녀의 몸을 그녀의 몸이라 생각하지 않고 살았을 것이니까.  인공관절이 들어 간 두 무릎을 주무르면서도 숙취에 늘어진 아들 밥상을 차린다. 나는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숙취로 늘어저 그녀가 무릎을 주무르며 끌고 온 밥상 앞에 앉는 대신 얼른 개수통에 손을 넣는다.  개수통에 손을 얼른 집어넣든, 그녀가 차려 준 밥상 앞에 앉든, 어떤 선택을 하든 나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곱디고운 모래가 음흉하게 어디서든 스르륵 스르륵 삐져나올 테니까.  


<파묘>에서 효도 하지 말라는 한만수에게 한세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한세진이 어머니 이순일이 조실부모한 자신을 키워 준 '체구 작은 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일에 동행하는 것이 효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본들 한만수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한세진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어머니 이순일의 헛헛하고 쓸쓸한 마음 곁에 잠시 머물기로 했을 뿐이라는 것을 길게길게 설명해본들 한만수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만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 편향된 사람이라고 바로 단정하는 사람이니까.  한만수는 뉴질랜드로  '탈조선'을 감행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고, 이순일이 물려받은 산을 갖는다. 이순일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영혼을 지배하는 '정상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또 다시 누군가를 안온한 나락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순일은 딸 한세진에게 자신의 살림을 물려받으라 한다. 그 살림이라는 것이 출가한 자식과 또 그의 자식을 돌보며 형제들이 모일 때마다 가장 먼저 음식을 준비하고, 가장 먼저 일어나 앞치마를 두르는 일인데.  한세진이 '정상의 법'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명제가 새겨진 몸이 되어야 한다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한만수가 선물로 가져온 기념품이 홀로코스트 생존가의 유품과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이웃 할아버지의 편지다) 

파묘, 묘를 없애버리는 것, 삶을,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 이순일은 키워 준 할아버지를 지움으로써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지인이 쓴 글을 읽었다. 그녀는  '흉터처럼 자꾸 불편하게 하는 사람, 쌍년이 되겠다'고 했다. 전화기 뒤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찌푸린 오만상을 누가 돌까봐, 들낄까 가슴졸이며 '네네'를 읊조리는 나는 '쌍년이나 흉터'는커녕 손까래기도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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