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6개월 만이다.
화요 씨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2015년 8월, 16개월짜리 둘째를 둔 나는 교직원공제회에서 돈을 빌려 A 신문사가 주관한 여행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횡단 열차를 타고 알혼 섬에 들어가는 여정 동안, 화요 씨는 내 옆에 있었다. 건물도 크고 길도 넓고, 나무도 전봇대처럼 단단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 날밤. 화요 씨는 술을 마셨고, 나는 과일주스를 마셨다.
화요 씨와 나는 횡단 열차에서도 침대 아래 위층을 나눠 가졌다. 젊은 내가 위층. 역시나 혼자 온 보슬 씨와 복직 씨가 우리 맞은편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넷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좁은 객실에서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고, 침묵했다. 화요 씨와 보슬 씨, 복직 씨는 술꾼이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술을 하나씩 꺼냈다. 기차가 정차하면 젊은 내가 뛰어 내려가 술 안주로 러시아 만두,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그동안 화요 씨는 담배를 피며 깊이 술을 들이마셨다. 술을 마시러 횡단 열차를 탄 것처럼 그들이 맘껏 술을 마시는 동안 차창으로 자작나무가 시간처럼 흘렀다. 해가 지고, 저 멀리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여전히 술을 마셨고, 나는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술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2002년 8월, 이스탄불의 ‘tree of life’에서 침대 아래 위층을 나눠 쓰던 일본 아이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친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스탄불 ‘tree of life’로 오고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와이파이가 없었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일본 아이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향을 묻히고 기어코 자신을 찾아올 친구를 기다렸다. 서로에게 행운을 비는 짧은 인사를 뒤로 하며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야지, 마음먹었다. 물론 술꾼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꿈꾼 건 아니었다.
술꾼의 대화를 듣는 건, 순간순간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으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어쩌면 진심과 진실일지 모를 그들의 마음과 사연을 들으며 나는 술꾼의 무방비에 기대에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알코올이 아니라 상대의 풀어짐에 기대어 나를 맡긴다. 그러다 보니 열차에서 읽으려고 싸갔던 테드 창의 책은 한 줄도 읽지 못하고, 대신 ‘사진 신부 진이’라는 가독성 좋은 책만 읽고 왔다.
‘애기 엄마? 공부해.’ ‘왜요?’ ‘우리말 듣는 거 보니까 잘할 것 같아.’
내 마음 깊은 곳의 욕망이, 술 취한 아저씨가 던진 한 마디에 솟구쳐 올랐다.
‘좀 더 근거를 대봐요. 더 해보세요. 왜 그만두세요?’
라고 내가 화요 씨를 다그쳤다고 한다. 아마도 비슷한 시대를 거친 세 술꾼의 해묵은 논쟁이 다시 있었을 것이고, 그 논쟁을 지켜보던 내가 술 취한 화요 씨에게 더 밀어붙이라고 응원을 보냈었나 보다. 나에게 공부하라고 한 보슬 씨는 그 말을 잊었겠지만 그 말에 나의 몇 년을 맡긴 것처럼, 화요 씨는 내가 한 말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고 한다. 우리는 고립된 작은 객실에서 술과 말, 그리고 그저 피고 지는 시간에 취해 자신의 시간,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차는 그렇게 이르쿠츠크에 닿았다. 이르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켜 유배된 러시아 귀족 장교와 그를 뒷바라지하러 온 러시아 귀족 부인들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화요 씨에게 말했다.
“저라면 저렇게는 못했을 거예요.”
화요 씨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은데. 별거 아니야. 상황이 그렇게 되면 다 해. 못 할 거 없어.”
화요 씨는 잊었겠지만 가끔 이 말을 생각한다. 탄핵 시위를 보면서도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나도 할 수 있겠지. 아이를 키우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생각했다.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2025년 2월, 화요 씨는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읽고 그 열차를 생각했다. 나도 말레이시아에서 이 책을 읽었다. 단 한 번의 짧고도 길었던 술 냄새 짙은 시간을 다시 원한 것은 아니다. 저 먼 곳에 슬쩍 흘려두고 온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 정동에서 화요 씨는 지난 십 년간 뿌려 놓은 것을 잘 정리해 보라고 했다. 나는 또 그 말에 기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