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험한 책읽기>, <글 쓰는 딸들>
장마에는 독서가 제격
머리도 자르고, 3개월 만에 앞코와 뒤축이 다 떨어져 나간 아들 신발도 바꿔주고, 주말에 상경하는 시동생 가족을 맞기 하기 위해 이불 빨래도 하고, 일 년 동안 딸아이가 나가던 연극모임 가족들과 첫인사도 나눈, 평온한 주말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아름다운 책 두 권을 읽었다.
먼저 읽은 책은 허윤의 <위험한 책읽기>다. 이 책은 이화학당이 문을 연 1906년을 시발점으로 <82년생 김지영> 열풍이 일어난 최근까지, 여성의 읽을거리들이 담아낸 여성 독자의 욕망은 무엇이며, 그녀들을 둘러싼 사회는 어떤 규율을 작동시켰는지를 통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여성의 독서를 한마디로 ‘위험한 책읽기’로 명명한다. 글을 읽고, 쓰는 여자에 대한 사회의 오래된 공포는 근대적 여성 교육이 확장되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성 독자들이 읽는 텍스트가 담아내는 섹슈얼리티 욕망이 ‘순결과 정조’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굳건한 ‘정상 사회’를 뒤흔들지도 모른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여성이 쓰고 읽는 문학을 ‘여류문학’이라고 명명하는 방식으로 배제해 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학 때, <교양국어> 교수님은 한국에서 '여류'라는 말을 뺄 수 있는 작가는 '박경리와 박완서' 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강의는 정말 지루했지만, 그분이 던진 이 한 문장은 내 삶의 매 순간,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평가의 준거가 되어 호시탐탐 나를 감시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여류인가?’ ‘내 취향은 모자라고, 하찮은 것, 빛나고 단단한 이성은 빠져나가고, 그저 예쁘거나 혹은 촌스러운 것만 남은 여류 취향인가?‘ 되물었다. 박경리처럼, 박완서처럼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 남자 교수(이후 이분은 서울대 교수가 되셨다)로부터 ‘여류’라는 딱지가 제거된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두 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여류’라는 딱지는 ‘여자라서 그래’, ‘여대 나와서 그래’라는 말의 동의어였다. 나를 둘러싼 것들을 설명할 때, ‘여류’, ‘여자’, ‘여대’라는 말을 붙는 경우는 나를 낮잡아보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가진 평가틀이 좁디좁은 바늘구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때 주로 ‘깊은 빡침’을 느낀다. 그리고 이 ‘깊은 빡침’을 바탕으로 나를 만들어온 것들에 감사하며, 지금의 이 모습으로 살겠다는 자긍심을 스스로 쌓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중성화되고, 신화화된 모습을 가진 척 행세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저 멍하게 있지 않고, 조금이나마 이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삶을 사랑하려고 했던 것은, ‘위험한 책읽기’ 덕분이었다. <위험한 책읽기> 10장의 제목은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페미니스트 저널IF>’다. 다른 장 모두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혜정이 자취방에 드러누워 IF를 읽으며 끝도 없는 수다를 떨다가 IF에서 소개한 영화를 보러 비디오방에 가던 그 시절이 떠올라 대중교양서를 읽다 울뻔했다. 혜정이 자취방에서 IF와 함께 읽던 유럽 여성작가들의 소설은 나를 멀미 나게 흔들어댔고, 멀미는 위험한 것이었다.
두 번째 책은, 그 자체로 문학이 된 <글 쓰는 딸들>이다. 뒤라스, 보부아르, 콜레트가 그들의 어머니와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정이 이들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분석한 글이다. 어떤 관계도 완벽할 순 없다. 누구보다 가깝다는 모녀지간도 예외일 수 없다. 뒤라스도 어머니 마리도 서걱대고 어긋나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산다. 때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갈망하고,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그 골짜기 속에서 길을 찾아 걸어가는 건, 결국 자신의 몫일지 모른다. 그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미안해하지 말고. 부족함과 넘침, 성숙함과 미성숙함 사이에서 특별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나간 이들의 삶과 문학도 ‘여류’였을까?
“저 멀리 뿌연 먼지 혹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 검은 모리스레옹볼레가 보인다. 그 남자의 자동차다. 차 안에 그 남자가 있다는 걸 마르그리트는 안다. 그가 자동차 뒷좌석, 흰 제복을 입은 기사 뒤편에 앉아 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한다.
마르그리트는 솟구치는 눈물은 누른다.
어머니와 오빠들이 옆에 있다. 그들 역시 그 자동차를 보았지만 알은척하지 않는다. 피에르가 폴의 귀에 대고 뭔가 농담을 던진다. 돌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교활한 눈으로 여동생을 훑는다. 분명 그 중국인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온 힘을 다해 눈물을 밀어 넣는다. 차오르는 울음을 양 볼 안에, 목국멍 속에, 가슴 깊숙이 가둔다. 이 눈물, 이 흐느낌, 이 절망은 잠시 지연되었다가 나중에, 쇼팽의 왈츠가 밤공기를 뚫고 들려올 때 다시 솟구쳐 오를 것이다. 정서적 반응 지연의 한 예인데, 마르그리트는 이런 종류의 지연을 빚어내는 비법이 있다.”(126쪽)
마르그리트의 소설을 다시 샀다.
다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