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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13. 2019

이별보다 슬픈

초심자의 손바닥 소설 _ 2

닥닥닥.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귀까지 들렸다. 

기연이 이렇게 벌벌 떠는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고 요동치고 긴장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자 그대로 몸이 벌벌 떨렸기 때문이다. 한파가 맹위를 떨치던 연말이었다. 


"어, 잠깐만... 됐어. 이제 얘기해."

성훈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기연은 후다닥 슬리퍼를 신고 대문 밖으로 향했다. 통화는 길어지고 날카로운 바람에 대책 없이 노출된 발가락들은 얼어붙어 따끔따끔했다. 따끈한 온돌방에서 잔혹하게 차가운 밤공기로 갑작스레 옮겨진 맨발처럼 기연은 전조도 없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당황스럽고 억울했다. 


방 둘에 화장실 하나 아주 작은 거실 겸 주방이 있었다. 

귀한 장남 방 하나 주고, 부모는 기연과 조금 더 큰 방을 나누어 썼다. 없는 형편에 꾸역꾸역 아르바이트해가며 열심히 대학교에 다녔다. 선배나 간혹 동기 녀석들이 던지는 추파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생활할 비용도 빠듯한 기연에게 연애란 마치 한강변에 반짝이는 건물들의 불빛 같은 것이었다. 남들 다 있는 집, 남들 다 있는 직장... 그렇지만 내게는 기어코 허락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기연이라고 어찌 그런 것들을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롤러코스터처럼 불쑥이는 뜨거운 감정, 민들레 홀씨처럼 은근히 흩날리는 마음, 두근거리다 못해 아프고 마는 설렘. 스물 하고도 넷, 제아무리 숨겨도 빛나는 청춘의 얼굴을 하고서 기연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기념일에 주고받을 선물, 밤마다 사랑을 속삭여야 할 통화비, 데이트에 차려입을 옷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기연에게도 어쩔 수 없이 연애가 시작되었다. 다행히,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성훈은 사회초년생이었다. 기연은 미안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되었다. 데이트비는 주로 성훈이 냈다. 정신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기연의 학교 도서관으로, 동네의 카페로 부지런히 뛰어갔다. 소탈하고 열심히 사는 기연을 그는 사랑했다. 성훈 역시 박봉에 야근이 잦은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취업 준비생인 기연을 앞세워 계산하게 할 수는 없었다. 기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소박하고 다정한 데이트가 이어졌다. 누가 봐도 무리하는 연애는 아니었으나 그들에겐 조금씩 무리하는 연애가 되어갔다. 만남이 길어질수록 그의 부담과 그녀의 미안함은 사이좋게 비례했다. 둘 중 누구도 나쁘지 않았지만 상황은 나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면 눕거나 방에서 편하게 앉아 달궈진 전화를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대개의 연인들 모습이겠지만 기연은 연애의 면면 중 이 '자기 전 통화'가 가장 괴로웠다. 부모님과 함께 자는 방에서는 물론 할 수 없었고, 화장실에서 소곤소곤, 혹은 대문 앞에서 골목을 서성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다고 성훈에게 상황이 이렇노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성훈이 연애의 종결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는 다정했고 따뜻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이 만남의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더 좋은 사람 만날 거라는 최악의 이별 멘트를 고했다. 솔직히 경제적으로 부담된다는 말도, 솔직히 데이트비를 보탤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서로 하지 못한 채 끝까지 착하고 답답하게 그들의 짧은 연애가 끝이 났다. 


기연은 울었다. 이별 통보를 받고 울지 않는 여자가 많겠냐만은 단지 이별이 슬퍼서는 아니었다. 사실 몇 개월 만나고서 그렇게 죽고 못 살만큼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통화마저 이 추운 겨울에 이를 닥닥 부딪혀가며 하게 된 자신이 서러워서, 꽁꽁 얼어 찬바람에 따끔거리는 발가락이 불쌍해서 울었다. 속시원히 제 방에서 울지 못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을 여느 때처럼 서성이며 미안해, 미안해, 알았어 따위의 말을 소곤거리는 자신이 짠해서 울어버렸다. 




십 년도 더 된 옛 일이 떠올랐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몰래 따라오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평범한 자신을 남자아이가 쫓아온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그 아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냄새나는 공중 화장실이 있는 다세대 주택을, 기연의 집을 보고 놀랄까 봐 겁이 났다. 그다지 인기도 없고 존재감도 없었던 아이. 새침 떨 상황도 몇 번 겪어보지 못한 평범하고도 순한 얼굴의 기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꽤 친해지고 싶었던, 다정하고 귀여운 남자아이를 굳게 마음먹고 째려보아야 했다. 


"쫓아오지 마!"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하고 획 돌아섰지만 태생이 그럴 수 없는 기연의 눈빛 끝엔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방울방울 맺혀 버렸더랬다. 민망하고 미안해 뜨거워진 뒤통수를 만지며 집에 들어가던 그날의 아이가, 허기지고 쓸쓸한 배를 한없이 문지르던 그날의 아이가 떠올라 기연은 얼어붙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또 다시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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