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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15. 2019

치대고 엉겨야 정이 들지

"아 왜 맨날 너만 새색시 내외하듯이 그랴?!
사람이 말여, 서로 엉기고 막 치대고 염치없고 그래야지 정도 들고 그러는겨어~"


헉. 드라마 보다가 정곡을 찔려버렸다. 


요즘 나를 아주 웃기고 울리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들을 잠깐 맡아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동백에게 준기 엄마는 다그친다. 

사람이 말여, 막 엉기고 치대야 정도 들고 그런다고. 밥만 주는 게 아니라 똥도 닦아준다고. 우리는 그런다고. 


옹산의 걸크러쉬, 준기 엄마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뭣하니까 글로 나불대 보자면 나는 인상 좋다는 말, 성격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누구 닮았다는 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말,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는 그런 말들. 하지만 사실 나는 마음속에 굉장한 새침데기 새색시를 모시고 산다. 아쉬운 소리는 좀처럼 하지를 못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당장에 갚을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그런 새색시를 말이다. 


지난날 젖먹이 아기를 키우던 나를 차에 태워 플리마켓도 데려가고 김장했다고 밥도 먹여주신 옆 집 할머니가 계셨다. 집에 틀어박혀 애만 보는 젊은 엄마가 딱해 이리저리 마음을 써주셨는데도 나는 그저 민망하고 어색하여, 꾸벅 감사하다고만 하고 말았다. 말 한마디 없이 쭈뼛거리는 내가 불편해한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는 늘 그렇게 내외하며 아이를 키웠다. 아파도 아기 안고 진료볼 자신이 없어서 병원을 가지 못했다. 아기를 잠시 맡겨도 막 보채고 울면 간호사들이 곤란할 테니까. 뚜벅이인 나는 어디 차 타고 갈 일이 있어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지인에게 부탁하지 못했다. 엄동설한에 아이를 안고, 택시를 타고. 그렇게 살아왔다. 전혀 놀랍지 않게도 우리 딸 역시 이 구역의 새침 퀸으로 커가고 있다. (...)


사실 새침한 새색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삼십 년 인생에 준기 엄마 같은 사람은 사실 여러 명 만났다. 아는 사람 없이 외딴섬처럼 살던 동네에서 나를 기꺼이 집으로 초대해주고 맛있는 반찬을 나눠주던 앞 집 엄마, 뚜벅이 엄마와 아이를 정류장이 아닌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신 버스 기사님, 오늘도 김장김치가 많이 생겼다며 나눠주던 아이 친구 엄마...


사는 게 어차피 그렇게 깔끔할 수는 없다는 것. 서로 좀 치대고 염치없이 살아야 정도 들고 마음도 나눌 수 있다는 것. 혼자 힘으로는 죽어도, 죽어도 살 수 없다는 이 자명한 진리 앞에서도 나는 우물쭈물하며 살았다. 도와주고 싶지만 도와줘도 될까 망설였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부탁해도 될까 걱정했다. 좀 부비고 엉겨야 온기가 생긴다는 것을 바보같이 모르고 살았다. 준기 엄마 말처럼 사람 사는 게 좀 치대고 염치없고 그래야 정이 드는 건데 어쩌면 아주 깔끔하고 각박하게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드라마를 보다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나도 옷고름 좀 풀어헤쳐봐도 되는 것 아닐까. (아니 왜 하필 옷고름을...?) 이제는 내 안의 새침한 새색시를 조금은 넉살 좋은 아줌마로 업그레이드시켜봐도 되지 않을까. 민망한 뒷짐, 쑥스러운 헛기침 그런 것 말고 다정한 팔짱과 별스러운 웃음 같은 것들로 조금 더 엉기며, 치대며 말이다. 


아무 족적도 없는 인생은 쓸쓸할 터. 인생은 다가와준 선물 같은 사람들로 반짝인다. 

늦가을의 쓸쓸한 마음이 약간의 잡념으로 따끈해져 온다. 





아니, 그나저나 엄마가 목욕탕에 간 동안 앞집 막둥이 언니 등짝에 업혀 놀았다던 아기는 왜 이렇게 새침하게 커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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