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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Dec 31. 2019

일기장과 다이어리

"그러니까 너는 일기장 같고, 얘는 다이어리 같아."


우리는 과 연합 엠티를 즐기던 중이었다. 평소엔 늘 수줍게 인사를 받는 한 학번 위 선배가 벌겋게 취기 오른 얼굴로 우리에게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일기장? 다이어리?

왠지 뉘앙스를 알 것도 같았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내 친구는 일기장이요, 꽤 사무적이고 간결해 보이는 나는 다이어리인 셈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일기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기빨리고 당 떨어지는 어린이들의 꿈과 환장의 언더더씨 아쿠아리움에 있었다. 아이와 남편은 한편에 마련된 놀이터에 가고 혼자 대형 수족관을 멍 때리며 바라보던 중이었다.

"여보세요?"

"윤발이~"

"웬일이야? 잘 지내?"

"그냥 목소리 듣자고 전화했어. 연말 잘 보내라고~"

일기장다운 연말 인사였다. 일기장과 나는 다섯 살 동갑내기 딸내미들을 키우고 있는터라 종종 아이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보고 싶어 눈물 날 것 같다고도 애틋한 본인 엽서 한 장 끼워 보내 놓고도 이렇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 수줍고 조용했던 선배의 통찰력은 보통 예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 선배와 우리는 도통 친하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끊고 다이어리는 무릎을 쳤다.


각별히 지내는 일기장과 유난히 멀리 떨어져 지낸 한 해였다. 그리고 일기장이 개인적인 일로 마음 많이 아팠을 한 해였다. 살뜰히 나를 챙겨 전화해준 일기장에게 전화를 끊고서야 쭈뼛거리며 고마운 마음을 중얼거렸다.

나와는 태생이 몹시 달라 일기장은 섭섭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시간과 일정 그 외의 무언가를 길고 진하게 나누기엔 좁고 딱딱한 사각틀뿐인 나를 이해하기엔 서운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친구로 지낸 지 십오 년이 더 되어서야 문득 든다.


한 시간 남짓 남은 새해를 앞두고 이런저런 상념만 말풍선처럼 주변을 맴돈다. 일기장 같은 삶을 살리라 다짐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다이어리라면 본업에 더 충실할 수밖에. 더 따박따박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부 메시지라도 보내고, 잊지 않고 축하할 일을 축하해주며 슬퍼할 일을 함께 슬퍼해줄 수밖에.


누구는 송년이다 말년이다 시끌벅적하게 보낼 한 해의 마지막 밤이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몹시 보고 싶어 지는 밤이다. 우스갯소리로 평생을 외딴섬같이 살아서 제주도에 연고 없이 내려왔지만 괜찮다고, 외롭지 않다고 말해왔지만 오늘은 왠지 그리운 이들이 그리운 밤이다. 무슨 말만 하면 큰 눈에 눈물 모으기를 잘하는 여리고 정 많은 일기장이 보고 싶어 지는 밤이다. 걸핏하면 우는 것을 타박하고 싶어 진다. 위로랍시고 농담 따먹기 식 유머나 될 대로 던지고는 웃는지 우는지 그 큰 눈을 힐끗 훔쳐보고 싶어 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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