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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03. 2020

유칼립투스와 패션 양말

지난 주말, 동네 화원에 구경을 다녀왔다.

마침(?) 지난해 들였던 삼색 버드나무가 잎을 떨구며 영면에 드셔서 남편은 호시탐탐 새로운 초록이들을 들이려고 기회를 보던 터였다. 가드닝 하수 레벨인 우리는 주제도 모르고 설렘의 콧구멍 평수를 넓히며 어여쁜 아이들을 구경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화원이라 그런지 식물들의 사이즈는 작았지만 꽤 저렴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나.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한텐 정작 말도 못 걸면서 괜히 옆에 있는 사람한테 하나마나한 농담이나 던지는 심리. 우리는 그렇게 눈길은 각자의 위시(나는 유칼립투스, 남편은 올리브)로 향한 채 아무 화분에나 "와~ 이것도 괜찮다.", "이거 멋지네"하며 영혼 없는 찬사를 날리며 화원을 한 바퀴 돌았다. 사실 작년에도 다른 화분들을 사 오며 안녕히 계세요 하는 순간까지 유칼립투스와 올리브가 눈에 밟혔었다.


이렇게나 머뭇거린 이유는 키우기 어렵다는 이야기에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친구는 유칼립투스를 일주일 만에 저 세상에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엄한 화분들만 들었다 놓으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종종거렸다. 점원이 "이걸로 하시겠어요?" 하면 "잠깐만요."하고 올리브 한 번 들여다보고 오고, 유칼립투스 한 번 들여다보고 오며 애먼 점원의 인내심만 시험하다 결국 한 번 키워보기로 했다. 사실 각 만 원씩이었으니 비싼 건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을 죽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우리 집까지 들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부디 무병장수하소서


사고 나니 너무 좋았다. 추운 베란다로 자꾸만 나가서 화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것이 행복지수 한 35%는 더 올라간 것 같다. 왜 이제 샀을까! 열심히 키워보고 혹시나 죽으면 그 기회에 잘 배워서 다시 키우거나, 그때 포기해도 되는 건데... 별로 애정도 없고 관심도 안 가는, 그저 무난한 아이들을 사다가 괜히 죽이기나 하고. 걔들도 내 심드렁한 마음을 눈치챘던 것 아닐까? 막 '주인 저거 맘에도 없는 물 주고 있네!' 하면서... 왠지 미안해진다.

아무튼 오랜만에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의 행복을 만끽한다. (아, 먹는 부분에서는 이미 굉장히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양말도 그랬다.

어두운 색이 수두룩한 겨울 옷들이 단조롭고 지겨워 예쁜 양말이나 몇 켤레 살까 했던 것. 그러나 어머나 세상에. 패션도 양말이라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비쌌다. 외벌이에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간단히 사기엔 왠지 망설여지는 가격. 잘 브랜딩 된 세련된 이미지의 양말 회사 사이트를 며칠 들여다보다가 그냥 아이의 속옷과 함께 묶음 배송을 할 수 있는 싸고 무난한 줄무늬 양말을 몇 켤레 샀다. 싸다고 다 비지떡은 아니지만 내가 산 싼 것들은 대개가 비지떡인데(물건 보는 눈은 목욕탕에서 엄마 못 알아보는 실제 시력처럼 굉장히 저하되어 있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발뒤꿈치에 포인트 색이 입혀진 싸구려 양말은 탄력이 없어 발꿈치 부분이 자꾸만 발바닥까지 흘러내려갔다. 그냥 예쁘고 질 좋은 양말 몇 켤레 사볼걸! 그게 뭐라고. 바보같이 싸구려 흘러내리는 양말을 신고 여전히 전에 봤던 양말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이건 알뜰이 아니고 궁상이야! 이긴 것 같은 기분으로 결제를 하지만 막상 사용하면 굉장히 패배감을 안겨주는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봄이 오기 전에 귀엽고 질 좋은 양말 몇 켤레를 사야겠다. 그리고 아이 돌보고 청소할 시간을 쪼개 새어 나오는 생각들도 바지런히 담아 적어야지. 그림책 이야기도 만들어봐야지.

망설이면 놓쳐버릴 사소한 행복들은 오늘도 우리 손가락 사이를 스르르 빠져나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굉장한 것 아니더라도 당장에 나를 흐뭇하게 만들어줄 것들을 찾아보리라! 소박한 용감함(?)을 장착하고 짐짓 용맹스러운 표정 한 번 지어보는 월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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