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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31. 2020

안녕히 가세요 홍산 할머니

내게는 외가에 할머니가 두 분이 계신다.

엄마와 이모 삼촌을 낳아주신 할머니(일명 부여 할머니), 그리고 그 이전에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셨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혼자가 되신 할머니. 부여군 홍산면에 살고 계셔 홍산 할머니로 알고 자라왔다.


홍산 할머니의 표정은 늘 딱딱했고 몸집은 다부져 보였다. 나는 쩌렁쩌렁한 음성, 무뚝뚝한 말투의 홍산 할머니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어린 눈에 홍산 할머니는 험상궂은 얼굴, 꼿꼿한 몸이 마치 마을 어귀의 장승같아 보여 무서웠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릴 적 우리 집에 잠시 계시면서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어린 오빠와 나를 키워주셨다. 친정집에 있는 옛 앨범을 들춰보면 오빠 유치원 소풍에 따라간 볼이 통통한 여자 아이가 홍산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서 있다. 여전히 딱딱한 표정과 몸짓으로 서 계신 홍산 할머니의 모습.


"오늘 홍산 할머니 돌아가셨다."

오늘 엄마의 메시지를 받고 문득 그 사진이 생각났다.

홍산 할머니와의 추억은 많지 않다. 아니, 홍산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다.

엄마가 중학교에 다닐 적 집에서 먼 학교에 다니느라 홍산 할머니 댁에서 숙식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살림에 일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는 엄마를 위해 멀고 누추한 서울 집에 와 계셨었다는 것. 이십몇 년 전 쌈짓돈을 모아 중학생이 된 오빠에게 당시 큰돈이었던 컴퓨터를 사주셨던 것. 한두 해 전부터 대전의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 그 정도다.




백 세를 두 해 앞두고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아흔이 넘도록 정정하셨다고 들었다.

홍산 할머니를 떠올리면 장군 같은, 아주 매운 고추 같은, 벼락같은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곤 하는데 오늘 부고를 들으니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긴 생애가 궁금해졌다. 떠올리기만 해도 외롭고 쓸쓸한 그 삶의 고개고개마다 할머니 눈엔 눈물이 고였을까. 아니면 아래로 쳐진 입을 더 굳게 다물었을까. 눈에 더 힘을 주고 더 큰 목소리로 말하지는 않았을까. 중학생이던 엄마를 어떤 마음으로 데리고 지내셨을까. 나와 오빠를 돌봐주러 부여-서울이라는 먼 길을 오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뚝뚝하고 단단한 얼굴 이면엔 어떤 감정이 그 삶을 둘렀을까... 


부여 할머니와 홍산 할머니는 평생 언니-동생하고 사셨다고 한다. 엄마와 이모 삼촌들도 홍산 할머니를 큰엄마로 여기고 살았기에 다 커서도 엄마 집에 들르기 전 꼭 홍산 엄마를 만나고 갔다. 홍산 할머니에겐 착하고 살가운 아이들이었다. 그렇다고 당신 생애의 큰 공허가 채워지거나 상처가 아물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엔 아이를 갖지 못해 버림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지만 엄마의 (큰) 엄마, 홍산 할머니의 삶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게 고작 삼 대 위의 일이라는 게 생경하게 느껴진다.


외할아버지는 엄마와 이모에게 '계집애' 소리 한 번 안 하던 다정한 아버지셨다고 했다. 추운 겨울이면 새벽같이 물을 끓여 씻을 물을 따뜻하게 준비해두셨고 동네에서는 점잖기로 소문난 어른이셨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김이 나는 엄마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더 입을 악다물고 장군 같은, 벼락같은 모양새로 늙어가는 한 여인을 떠올린다. 홍산 할머니 삶의 면면이 어땠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의 생애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켠이 시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초봄의 바람을 맞으며 오래 서 있는 것처럼 천천히 추워지는 기분.


요양원 직원인 엄마는 때가 때인지라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장례식에 가보고 싶지만 병원에 날마다 일과와 동선을 보고 해야 해서 그럴 수도 없다고. 상주를 서는 외삼촌은 가족들에게 최대한 간단히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고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가시는 길 마저 쓸쓸해 마음이 아프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시기를...

안녕히 가세요. 홍산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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