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에서 엄마로 살기
"애기 엄마, 여기 앉아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혼자 아기 안고 소아과에 가던 길, 버스 안에서 처음 '애기 엄마' 소리를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따뜻하고 정감 가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애기 엄마"는 또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각종 ‘충’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맘충, 급식충, 틀딱충, 한남충…
인터넷 뉴스 댓글만 보자면 이건 뭐 벅스 라이프, 세스코 광장이 따로 없다.
각종 혐오들로 들끓는 시대에 엄마로 사는 건 꽤나 눈치 보이고 주눅 드는 일이다. 일부 몰지각한 엄마들의 이슈가 잊힐만하면 ‘땡땡(지역명) 맘 카페’ 사건 따위의 제목이 또다시 실시간 급상승 키워드로 떠오른다.
키즈 카페가 아닌 이상, 탁 트인 공원이 아닌 이상 어딜 가든 눈치가 보인다. 우리 아이는 그다지 남들 눈에 띄는 스타일 (목소리가 크거나 타협 불가의 떼를 쓰는)도 아닌데 말이다. 소위 말하는 ‘핫한’ 플레이스는 아예 갈 생각도 않는다. 하지만 조심해도 한 번씩 받는 눈총을 받을 때가 있다. 어느 날은 국숫집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잠이 덜 깨서 징징거렸고, 나는 얼른 아이를 안아 달랬다. 보통 잠이 덜 깼을 때는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밖에 있다가 들어가거나 하는 편인데 추운 날이라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뒤통수에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친구와 여행 온 아가씨가 좋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칭얼거림은 잠깐이었지만 민망함과 왠지 모를 짜증은 국수를 먹는 내내 계속됐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일이다.
나 역시 미혼 시절엔 그 아가씨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사람 많은 곳에 아이를 데리고 힘들게 다니는 엄마 아빠들을 보면 ‘왜 굳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이와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고, 가끔은 사람들 속의 나를 느끼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이를 낳았다고 매일을 외딴섬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에게 “너도 애 낳아봐” 따위의 꼰대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정도랄까. ‘너그럽게’도 아니, 그냥 조금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듯한 씁쓸함
아이를 키우며 늘 이런 민망한 시선만 받아온 것은 아니다. 카페에선 시킨 메뉴 외에 아이 주스나 우유, 아기 밥 등을 선뜻 주시는 사장님도 많이 뵈었고, 대중교통을 탈 때도 먼저 차례를 내어주는 등의 배려도 많이 받았다. 부모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사실 이런 것은 과분하고, 아이에게 그저 짓궂은 표정, ‘안녕~’하며 아이를 귀여워해 주는 액션만으로도 몸 둘 바 모르게 고마워진다.
아, 물론 부모들에게 “이렇게 해달라”는 것은 또 아니다. (아니 이 글, 왜 이렇게 변명으로 얼룩지고 있는 건가…) 그저 이런 입장도 한 번쯤 알아달라는 것.
노 키즈존, 서운하긴 하지만 이해한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해는 하지만 서운하다. 내가 이해하고 말고의 입장은 아니지만.) 분위기 좋은 카페에 부러 열심히 찾아갔는데 내 돈 내고 아이의 부산스러움을 마시고 싶을 이 누구겠는가. 세상 무엇도 두렵지 않은 ‘네가 뭔데 나를 막지 마 내가 간다’의 마이웨이 유아기 아이들이 분위기 좋은 카페 또는 음식점에 미치는 영향… 크게 짐작이 가고, 당장 내 아이의 저 자연산 활어 같은 몸짓만 봐도 실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십분 이해하면서도 막상 찾아간 곳의 문 앞의 ‘노 키즈’라는 단어를 보면 내 존재(내 분신의 존재)를 거부당한 씁쓸함이 온몸으로 밀려온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는 관광지인만큼 카페도 꽤 많은데 카페가 많은 만큼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은 만큼 노 키즈존도 많다. 지난번엔 내부도 넓고 해서 아이랑 가기 괜찮겠다, 개 사진도 많으니 노 키즈존은 아니겠다(무슨 근거였을까?) 해서 찾아가려던 카페는 ‘No Kids, But Pet’ 카페였다. 친구들끼리 “개만도 못한 우리 딸 으흑흑”하고 웃고 넘겼지만 가슴 한 켠의 씁쓸함은 어쩐지 달래지지가 않았다.
혐오의 시대에 엄마로 산다는 것
그래, 아이가 클 때까지 그깟 커피야 별다방, 콩다방, 백다방 가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래도…’이런 접속사가 마음속에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뒤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모두 함께 살고,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었)고, 누구에게나 그런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
모든 엄마들이 뉴스에 나오는 ‘맘충’은 아니다. 세상에 똘아이는 많다. 똘아이, 똘줌마, 똘...할아버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그 그룹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속한 그룹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질하는 이 '혐오'의 시대에 엄마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의기소침해진다. 무력해진다.
물론 애 키우는 나조차 기함하게 만드는 이슈엔 그런 반응들이 지당하다 싶지만 혹여나 우리 아이가 폐를 끼칠까 달래고, 혼내고, 애원하는 부모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기차 안에서, 비행기에서 빽빽 우는 아이를 보면 곤두선 눈빛보다 ‘저 엄마 얼마나 애가 탈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 내 친구, 내 형제자매의 모습, 우리 엄마의 옛 모습일지도 모르지.’ 해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애 낳은 것 하나로 ‘쭈글쭈글’ 해지는 것이 속상하다. 때론 우리 사회가 진짜 아이를 원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이미 구구절절 써버렸지만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이 짧은 글로 이 쭈글거림을 마무리하고 싶다
아이를 나무라지 마라. 지나온 길인데.
노인을 비웃지 마라. 가야 할 길인데.
_ 에이 로쿠스케의 <대왕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