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vs 애(같은)엄마
“엄마, 이제 바다에 놀러 와서 물고기를 잡는 거야. 여기에 물고기를 넣자.”
아이는 장바구니를 들이밀며 신나게 말했다.
“응, 그래.” 육아 24시 언제나 쩔어있는 저질체력 애미는 기력 없이 대답하곤 후다닥 늘어놓은 물고기(라고 아이가 설정한 장난감 과일)들을 바구니에 넣어버렸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진행이 아니다.
“우와~ 물고기 많다!” “아싸 한 마리 잡았다~” “어어, 놓쳤다 아쉽네” 등 실감 나는 액션과 찰떡같은 멘트, 아이가 기대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나는 모두 생략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다시 또 물고기를 잡자고 바구니를 비워냈다. 아이는 한 시간이 넘도록 역할놀이에 몰입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 놀이 좀 그만하면 안 돼? 엄마 이거 하기 싫단 말이야!!” 해버렸고, 아이는 싫다고 으앙 울었다.
파란나라 천사들, 미안...
이런 못난 애미… 왠지 귓가에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희망이 가득한~ '로 시작하는 동요가 들리는 것 같다. 파란 나라의 불청객이 되어 파란 나라 천사들에게 장난감을 집어던지며 개판을 쳐놓고 꺼먹 나라로 만들어 버린 깜깜이 괴물(아이가 밤 되면 무서워하는 가상의 존재)이 된 기분이다.
하- 상상력과 사회성을 높여준다는 역할놀이, 그 역할놀이! 미치도록 하기 싫다! 나는 작게라도 성취(결과물)가 없는 반복적인 놀이에는 정말 쥐약이다. 하기 싫어 미치겠다. 지루해서 돌아버리겠다.
신나는 아이의 역할놀이에 판을 깬 건 그저 한심한 엄마의 에피소드 일뿐이지만 같은 결로 내 육아의 어려움은 주로 여기에 있었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 거의 매 순간 의지가 좌절되어 나중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득해지게 되는 것이다. 육아하는 것이 비교적 편안하고 능숙해 보이는 엄마들을 보면 이 작고 사소한 희생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뭔가 ‘엄마다운 엄마’랄까. (쓰고나니 무척이나 편견 덩어리의 표현이군. 그런 게 늘 자연스럽고 당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직장도 마찬가지로 내 의지대로 살 순 없다. 하지만 의지가 좌절되는 타이밍은 매우 다르다. 육아는 정말 미세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마저 가로막는 상실과 좌절의 타이밍이 너무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대체 뭐냐!
처음 신체 자유의지의 좌절을 맛본 것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던 때다. 꿀떡꿀떡 잘도 젖을 먹는 갓난아기를 도중에 내려놓고 큰 일을 보러 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유하며 변기에 앉을 (…죄송합니다 여러분) 수도 없는 노릇.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열심히 그분들의 탈출(?)을 막았다.
라면을 끓이다가도 아이가 사고를 치거나 다쳐서 울고 있으면 일단 수습을 해야 했고, 불어 터진 라면, 식은 국, 방바닥 식사 등은 뭐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날씨가 좋아 산책을 하고 싶어도 집순이 딸에게 리젝 당하면 네, 네하고 간식이나 내와야 했으며,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아이 덕에 세 시간 동안 종이접기를 하다 엉덩이에 감각을 잃을 뻔했다.
그래, 나도 안다. 다 지나면 그리워질 일이란 걸. 다들 수고롭고 고단하게 아이를 키운다는 것. 이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하는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모두 반짝거릴 순간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정신 차렸을 때 (또는 아이가 잘 때) 뿐이고 하루하루 삐뽀삐뽀 육아 24시를 달려가는 나는 그저 “다섯 번 너 원하는 거 했으면 한 번은 엄마 하고 싶은 것도 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노양심!” 외쳐보는 거다. 안 통할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오늘은 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홈메이드 슬라임에 두 차례의 실패 끝에 성공했다. 일명 바풍(바닥풍선)을 크게 만들어서 아이의 환호성을 듣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아 끝까지 집착하고, 같이 하고 싶다고 슬라임 끄트머리를 들고 있는 아이에게 잠깐만 놔보라고, 이거 놓으라고 정색하다가 결국 울렸다.
올해 아이 나이 5세, 나는 35세. 3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 나는 오늘도 무자비한 깜깜이 괴물을 자처한다. 자매 없는 외동딸에게 박 터지게 싸우는 자매 체험을 시켜준다. 자상한 엄마, ‘어른 같은’ 엄마는 이미 글렀다. 아이의 고집과 나의 우왕좌왕함으로 권위를 잃은 지는 오래다. 한심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커서 이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우리 엄마 철은 좀 없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친구였어.” 하고 말이다.
내일은 좀 참아주고 맞춰줘야겠다. 정신연령 35세는 안되더라도 십 대라도 되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