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친구같이 느껴진 날

by 잠전문가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선득한 가을바람이 불던 어느 날.

커피를 내리고 아이에겐 우유를 따라 건네주며 베란다에 나란히 앉았다. 두런두런 대화를 하다가 당뇨 이야기까지 나왔다. 엄마의 작은 엄마는 당뇨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많이 참아야 했어. 뭐 그런 말을 했던가. 먹고 싶은 음식을 참아야 하는 병이라니 아이는 너무 가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오는 병을 막을 순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된다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건강에 좋지 않지만 마음엔 좋은 음식은 가끔 먹으며 운동을 자주 하고 지내야 한다고 늘 그렇듯 나도 못 지키는 것들을 말했다.

아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열어주는 것은 처음엔 그저 재미있고 귀엽다.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처럼. 뻐끔거리는 입을 신기하거나 뿌듯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 세계가 완전히 열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물 밖에서 먹이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물속에서 같이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다. 던져진 주제를 서로 주고받으며 유영하는 기분은 자유롭고 풍성하다.


티타임을 끝내곤 책상에 마주 앉았다. 아이는 아는 글씨를 조합해 쓸 수 있는 단어를 썼고, 나는 말씀 묵상과 글쓰기 안내서를 읽고 글을 썼다. 서슴없이 그어진 획들은 아이 얼굴처럼 명랑하고 맑았다. 아이는 더듬더듬 동네 가게의 간판들을 읽거나 물어보며 봄과 여름을 보내더니 단어 몇 가지 쓸 수 있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올챙이 뒷다리 나오듯 때가 되면 걷고 서고 말하고 쓰는 아이가 신비롭다. 살면서 가장 멋지고 신비로운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한다. 축복이다.


여름내 후끈하던 공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우리는 어색함 반 설렘 반으로 까맣게 탄 여름의 흔적을 긴 소맷자락 안에 끼워 넣는다. 선선한 바람이 부니 커피를 마시러 나가자고 하는 아이의 제안이 깜찍하다.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아 아이는 숨은 그림 찾기 책을 보고 나는 창밖 구경을 한다. 옆에 앉은 아이의 사뭇 진지한 얼굴을 보자니 음료를 쏟을까 의자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날들이 정말 있었던 날들인지 아득하기까지 하다.

잘못된 자세로 잤는지 어깨와 목이 종일 뻐근하고 아프다고 했더니 함께 스트레칭을 해주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제 좀 괜찮냐 또는 아직도 아프냐 하며 경과 체크를 해오던 아이. 잠들기 전에도 아프냐고 물어보고 기도를 해주었다. 쉬야도 못 가리던 아기는 이제 없고 귀엽고 멋진 친구가 하나 생겼구나. 마음이 든든하다.


3.jpg 너와 함께하면서도 자유롭다 느끼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


결혼 전 마지막으로 엄마와 쇼핑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우리는 살 것이 없어도 (물론 돈이 없어도) 팔짱 끼고 동네 아웃렛이나 백화점 한 바퀴 도는 것을 좋아했다. 너 이거 잘 어울린다, 엄마 이거 젊어 보인다 하면서. 결혼과 출산 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쇼핑이나 그 밖의 데이트는 꿈도 못 꿨고, 가끔 만나던 것 마저도 내가 제주에 내려오면서부터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엄마의 신발을 고르러 들어간 백화점의 한 매장에서 점원은 참 좋겠다고, 딸이랑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제 시집가서 이것도 땡이예요. 하는데 그 땡이 어찌나 아프게 들리는지 마음 한편이 스산해졌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친구로 지내는 생활은 끝난 것 같은 기분. 그저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며 그리워하는 엄마만 남았다.

그런데 오늘 돌이켜보니 일상을 긴밀히 공유하는 친구 같은 모녀 사이가 슬금슬금 사라지는 동안 곁에서 한 아이가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엄마, 맘마 밖에 모르던 아이는 열심히 자라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카페 데이트를 하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잃고 또 얻으면서 여섯 살 친구의 옆에 앉아 삶의 모양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며칠 뒤

너는 왜 네 맘대로만 해!

그러는 엄마는 왜 엄마 마음대로만 하는데! 하고 서로 눈 흘기고 그 사이에서 남편은 등이 터졌다는 찐우정의 진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정하기의 가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