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책, 애는 애
아이는 올해로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 키워온 지난 4년 중 미안함과 후회로 눈물지었던 밤은 며칠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꽤나 많을 것이다. 마치 책장에 쌓인 육아서처럼 말이다.
인간 활화산이 되어 분노의 콧김을 뿜어낸 날엔 자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1차로 눈물 쏟고, 2차로 육아서를 주문했다. 그것으로도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내 책장의 육아서는 아이를 향한 미안함과 비례하며 자리를 늘려갔다.
초보 엄마 시절, 아이에게 화와 짜증을 대방출한 날엔 팔다리를 곱게 접어 쓰레기봉투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육아서를 읽으며 자책하고,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커가는 아이와 함께 나의 육아 경험치도 증가하자 육아서는 그저 참고용으로, 마인드 컨트롤용으로 가끔씩만 들춰보게 되었다. 마치 그냥 앓아도 7일, 약 먹어도 7일이라는 감기처럼 책을 읽는다고 하루아침에 내 육아의 어려움이 개선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책 한 권 읽는다고 사람이 달라지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 재테크 책을 몽땅 해치우고 재테크의 신이 되어 있으리!)
그래서, 그 사람은 책대로 키웠대?
육아만큼 정답이 없는 분야도 없어서 책에 나온 내용이 절댓값은 아니었다. 저자와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내 아이도 그의 아이와는 다르다. 나와 아이의 특별한 성향과 특별한 유대관계는 오롯이 우리의 것이다. 책과 똑같이 해석되지도, 개선되지도 않는 것이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나 아동심리학 박사의 책을 읽고 남편에게 “여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대.” 얘기하면 남편은 매번 딴지를 걸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책에 쓴 대로 키웠대?”
으이그, 하고 말았지만 어찌보면 맞는 말이었다. 육아는 이론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이론이 모든 아이에게 정답은 아닐 수도 있었다.
육아서를 읽지 말라거나 쓸데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도움이 되는 육아서는 너무나 많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잘못들을 고칠 수 있고, 아이를 이해하는 폭도 훨씬 넓어진다. 그저 책과 나를 비교해가며 자책하거나 책에 쓰인대로 아이와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육아서는 딱 참고용, 마음 다지기용 정도가 좋은 것 같다.
아기는 나무 같이 큰단다
육아의 고통은 감정적인 것들(나는 부족한 엄마가 아닐까 하는 자책감,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함)이 주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이런 미묘한 감정들이 해소될 틈 없이 가동되는 육아 24시, 쌓여가는 피곤함이란…
<삐뽀삐뽀 119 소아과>의 저자 하정훈은 아기는 나무 같이 큰다고 말한다. 엄마가 늘 옆에 붙어 있다고, 뭘 열심히 해준다고 달리 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저 나무처럼 크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것이다. 감정적인 것도 그렇지 않을까? 엄마도 사람이니까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다고 자연스럽게 넘기고 털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아이와의 관계가 유독 어려울 때,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땐 남들처럼, 책처럼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어제의 나보다 나을 나'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토닥여줄 일이다.
기억하자. 반성머신이여!
내 아이에게 최고의 엄마는 소아정신과 의사도, 아동심리전문가도 아닌, 아이 곁에서 매일 울고 웃는 나라는 것을.